Alaouite Dynasty (알라윗 왕조)
AD 1661-
Alaouite 왕조 (아랍어 : سلالة العلويين الفيلاليين, Sulālat al- 'Alawiyyīn al-Fīlālīyn)는 현재 모로코 왕실이다.
오늘날에도 모하메드 6세 국왕(Mohammed VI)이 모로코를 통치하고 있는 알라위(Alawit) 왕조는 아라비아의 얀보(Yanbo)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왕조의 조상은 13세기 초 두 번째 메리니드(Merinids) 술탄 아부 야쿱 유세프(Abu Yacoub Youssef, 1286-1307)의 통치 시대 때 타필라렛(Tafilalet)에 도착한 예언자의 후손인 하산 알 다킬(Hassan al-Dakhil)이었습니다. 그는 셰리프(Sherifian, 아랍 정통혈통) 가문의 후손으로 모로코에서 존경을 누렸습니다. 그 후 타필라렛(Tafilalat)은 알라위족의 거점이 되었습니다. 모로코가 총체적 무정부 상태에 빠졌을 때 사디(Saadi)인들이 이를 극복하지 못하자 알라위파 족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물레이 셰리프(Moulay Chérif, 1631-1636)와 물레이 모하메드(1636-1664) 1631년 52세의 나이에 물레이 셰리프는 타필랄레 주민들로부터 드라(Draa) 지역의 자우이아 세력의 확장으로 위협받는 지역의 방어 사령관을 맡게 됩니다. 타필라레의 수장인 물레이 셰리프는 사드 왕조의 마지막 왕들에 맞서 반기를 든 최초의 셰리프(Sherifian)였습니다. 사령관으로 임명된 지 5년 후, 그는 물러났고 그의 아들 중 한 명인 물레이 모하메드(Moulay Mohammed)가 필랄리언(Filalians)들에 의해 후계자로 선택되었습니다. 그는 타필라렛(Tafilalat)에서 라이벌을 제거하면서까지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한 후 필랄리언의 거점을 물루야(Moulouya)와 드라(Draa) 계곡으로 확장하는 데 성공하고 술탄으로 선포되었습니다. 미래 알라파 권력의 토대를 마련한 것은 물레이 모하메드(Moulay Mohammed)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후 그의 동생 물레이 라쉬드(Moulay Rachid)가 그의 업적을 완료했습니다.
물레이 라쉬드(Moulay Rachid, 1664-1672) 통치시대
물레이 모하메드(Moulay Mohammed)의 동생인 물레이 라쉬드(Moulay Rachid)는 알라윗(Alawit) 왕조의 진정한 건국자였습니다. 1664년부터 1672년까지 10년도 채 되지 않아 물레이 라쉬드는 시질마사(Sijilmassa)에서 물루야(Moulouya) 계곡 아래까지 이어지는 캐러밴 루트 전체를 장악하는 것을 시작으로 모로코 전역을 장악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이 루트는 한편으로는 지중해와 사하라 사막을 연결하는 통로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모로코의 사하라 횡단 무역로에서 얻은 수익으로 물레이 라쉬드가 군사 작전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고 군대를 무장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전략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했습니다. 1668년, 그는 드라(Draa)의 강력한 자우이아 세력을 제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심장부인 드라(Draa) 마을을 점령한 후 폐허로 만들었습니다. 이듬해 마라케시는 정복되었고, 1670년에는 일리그 자우이아도 함락되었습니다. 이 덕분에 물레이 라쉬드는 오랜 기간의 무정부 상태를 종식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정치적으로 모로코는 점차 재건되었습니다. 문필가이자 현명한 정치가였던 그는 페즈에 이슬람 서부에서 가장 큰 메데르사인 알-체라틴(al-Cherratin) 메데르사(madrasa)를 설립했습니다. 1672년부터 그는 자신의 통치 기간 동안 평화를 누렸던 페즈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는 페스 지디드(Fez Jdid) 북쪽에 위치한 체라다(Cherada)의 카스바(Qasba, 요새)와 알-체라틴(재단사)의 메데르사, 세부강을 가로지르는 대형 다리를 건설했습니다. 물레이 라쉬드는 마흔두 살의 나이에 말에서 떨어지는 사고로 갑자기 사망했고, 더 이상 그가 야심적으로 추진 중 이였던 국기재건 사업은 멈추고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그의 동생인 물레이 이스마일(Moulay Ismail)이 왕권을 넘겨받았지만 모로코는 매우 내부적으로 불안전한 상태였습니다.
물레이 이스마일 (Moulay Ismail, 1672-1727) 통치시대
물레이 라쉬드의 이복형제이자 그의 두터운 신임을 받은 물레이 이스마일은 물레이 라쉬드가 남쪽에서 싸우는 동안 모로코 북부 지역 사령관을 맡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총독으로 있던 도시 메크네스(Meknes)에 술탄으로 선포되었습니다. 물레이 이스마일의 통치는 시작부터 매우 어려웠습니다. 모로코를 안정시키고 무정부 상태와 특정주의를 극복하고 반대 세력 종교단의 위협적인 힘을 약화시키는 데 거의 20년이 넘게 걸렸습니다. 그 후 그는 모로코의 정치적 통합을 회복하는 데 드디어 성공했습니다. 그는 모리타니(Mauritania)와 투아트(Touat) 지역에서도 자신의 권위를 확립했습니다. 오랜 통치 기간 동안 물레이 이스마일은 강력한 군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이러한 국내 문제 외에도 물레이 이스마일은 모로코의 기독교 세력에 대항하는 성전인 지하드도 관여했습니다. 1681년 메흐디야(Mehdia), 1684년 탕헤르(Tanger), 1689년 라라쉬(Larache), 1691년 아르질라(Asilah) 등 10년 동안 포르투갈 군의 점령지와 영국군의 요새를 무력으로 모두 탈환했습니다. 그러나 유일하게 예외로 마자간(Mazagan)은 1769년까지 포르투갈 영토로 남아있었습니다. 오스만 제국의 위협에 직면한 물레이 이스마일은 모로코의 동쪽 국경을 요새와 방어용 카스바(성)을 쌓아 방어하는 데 성공하고 타자(Taza) 도시를 중심으로 한 군사 체계를 완성했습니다.
이 위대한 왕의 업적 중 하나는 강력한 군대를 양성한 것입니다. 이 군대는 흑인 노예 군, 부족들 산하 사병, 외국인 용병 등으로 나뉘어집니다. 물레이 이스마일은 상비군을 창설하여 전국의 요새와 성에 파견했습니다. 그리고 여러 부족들은 사병들은 군 복무의 대가로 토지를 받는 일종의 봉건적 계약 관계였습니다. 외국인 용병들은 때때로 포병이나 공병과 같은 기술 병력의 일부를 구성하거나 전투에서 선봉 부대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외부 적으로 물레이 이스마일 통치하에 모로코는 유럽에 중요한 무역 파트너였으며 유럽은 모로코를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로 간주했습니다. 무역 및 포로 석방과 관련하여 모로코는 프랑스 및 영국과 대사관 상호설치 협정을 맺습니다. 주요 유럽 국가들은 영사를 모로코에 상주시켰습니다. 한편, 이번에 남쪽으로 방향을 틀은 물레이 이스마일은 모리타니와 투아트에서 자신의 권위와 영향력을 확립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모로코와 세네갈 강 계곡, 니제르 강 루프를 잇는 사하라 횡단 무역로에서는 이제 모로코 화폐와 무게 및 측정 단위를 기준으로 거래가 이루어졌습니다. 트라르자의 무어족 주민들은 모리타니와 마찬가지로 물레이 이스마일을 자신들의 영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물레이 이스마일이 사망한 후 후계자 쟁탈전으로 인해 모로코는 또다시 무정부 상태와 혼란이 일어났습니다. 거의 30년(1727-1757) 동안 국가 재정은 바닥이 났고 식량 위기, 심지어 기근의 발병으로 이어졌습니다. 물레이 이스마일의 아들 일곱 명이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모로코 전역에서 내전이 발발했습니다. 그 사이에 열두 번이나 왕이 바뀌었습니다. 물레이 압달라는 왕위에 즉위했다가 다섯 번이나 전복되었습니다. 페즈 주민들의 반란을 진압해야 했던 그는 페즈 남쪽에 요새화된 모스크인 다르 다비바그(Dar Dabibagh, 작은 무두장이의 집)를 짓고 성벽의 일부를 해체했습니다. 그는 또한 페즈에 퐁두크(fondouk, 분수)와 네자린(Nejjarin) 구역을 만들었습니다. 1732년에는 페스-지디드(Fez Jdid)에 물레이 압달라 모스크를 지었습니다. 이 황실 모스크는 대부분의 알라윗 가문의 왕족 묘지와 인접했습니다.
메크네스(Meknes) 도시에서 그는 화려했던 마디나트 알 리야드(Madinat al-Riyad) 지역을 파괴했고 밥 알 만수르(Bab al-Mansour) 성벽을 만들었습니다.
초기 알라윗(Alawits) 왕조의 업적
알라위 최초의 위대한 군주인 물레이 라쉬드는 정치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문명화 사업에 몰두했습니다. 문필가이자 현명한 정치가였던 그는 페즈에 이슬람 서부에서 가장 큰 메데르사인 알-체라틴 메데르사(테일러즈)를 설립했습니다. 1672년부터 그는 자신의 통치 기간 동안 평화를 누렸던 페즈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는 페스 지디드 북쪽에 카스바 데 체라다를 건설하고 세부강을 가로지르는 큰 다리를 건설했습니다. 알 체라틴(Al-Cherratin)의 메데르사(madrasa), 라바트의 우다야(Oudaya), 물레이 라쉬드의 작품 일부, 알 마라카 등 여러 왕실 거주지는 모두 알라위 왕조 예술의 특징을 잘 보여줍니다. 이전 시대의 업적을 계승하는 동시에 테마의 통일성에 대한 열망, 실행의 웅장함에 대한 취향, 고전을 깨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공식을 추가하여 새로운 과정을 강조하려는 관심 등 알라윗트 창작의 특징이 될 새로운 방향이 이미 드러난 것이었습니다. 삼나무, 페인트 칠한 목재, 젤리 및 장식용 목공예품의 사용은 과거보다 더 광범위했습니다. 알라윗 문명의 진정한 붐이 시작된 것은 물레이 이스마일의 통치 아래서였습니다. 그는 메크네스(Meknes)를 수도로 삼아 제국의 도시로 격상시켰습니다. 메크네스는 모스크, 궁전, 기념비적인 문, 별궁, 분수대 등이 건설되면서 전례 없는 도시 개발이 이루어졌습니다. 위대한 건축가이자 종교심이 깊었던 그는 카스바, 밥 베르다인, 지투나, 부 아자, 시디 사이드 모스크, 라크다르 모스크, 다양한 영묘를 세웠습니다. 물레이 이스마일 시대의 예술은 위풍당당하고 강력했습니다. 그는 또한 메크네스를 모로코에서 가장 요새화된 도시로 만들었는데, 길이 40킬로미터가 넘는 성벽에 기념비적인 성문을 만들었고 성 안에 수많은 별궁이 배치되어 있으며, 그 가운데에는 광활한 녹지 공간과 함께 별궁과 식량, 마구, 무기 저장고 등 다양한 별관 건물이 세워져 있습니다. 주변 지역에는 광활한 초원(Agdal)과 과수원이 단지를 둘러싸고 있어 마치 천국 같은 느낌을 줍니다. 풍부한 장식과 다양한 형태 및 재료 덕분에 이 도시는 "모로코의 베르사유"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변화의 시작을 알리는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시디 모하메드 벤 압달라 (Sidi Mohammed ben Abdallah, 1757~1790) 통치시대
1757년, 아버지 물레이 압달라(Moulay Abdallah)가 사망하자 마라케시 총독 시디 모하메드 벤 압달라(인 Sidi Mohammed ben Abdallah)가 왕위를 계승했습니다. 사디 왕조의 술탄 알 만수르(al Mansour)를 존경했던 이 술탄은 군대를 직접 지휘하고 부족들의 관리 질서를 재확립하고 체리피안의 권위를 회복하고 황폐해진 나라를 재건해야하는 무거운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의 최우선 과제 중 하나는 무정부 상태에 부분적으로 책임이 있는 아비드(abids, 흑인노예 근위대) 세력의 권력을 무너뜨리는 것이었습니다. 술탄은 여러 차례에 걸쳐 아비드를 학살했고, 15,000명만 여러 주둔지로 나누어 베르베르족이나 귀치족 신병들과 함께 그곳에서 살도록 강요했습니다. 모로코 해안선의 특정 지점에서 기독교인의 존재를 없애고 싶었던 시디 모하메드 벤 압달라는 유럽 국가들의 해상 보복을 우려하여 해안 도시를 요새화하고 포병을 상주시켰습니다. 시디 모하메드 벤 압달라가 1769년 포르투갈이 점령하고 있던 마자간(Mazagan)을 싸울 필요도 없이 정복했습니다. 그는 군사들이 마자간을 포위했고 포르투갈은 크게 쓸모없는 이곳에서 스스로 철수를 결정합니다. 그 후 시디 모하메드 벤 압달라(Sidi Mohammed ben Abdallah)는 모로코의 무역 파트너 국가들의 수를 점차 늘리기 시작했습니다. 통치 기간 동안 시디 모하메드 벤 압달라 국왕은 대서양 연안에 여러 항구를 건설하고 모스크, 학교, 함맘, 성벽 등을 건설하여 안파(Anfa, 카사블랑카) 지역에 활기를 불어넣었습니다. 카사블랑카 항구의 현대화와 인프라 구축은 1765년 에사우이라(Essaouira Mogador, 모가도르) 도시의 설립과 마찬가지로 술탄의 대외 개방 정책의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는 모로코의 대외 무역 대부분을 자신이 쉽게 통제할 수 있는 항구로 집중시키고자 했습니다. 모가도르만은 이상적인 장소로 보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현실화하기 위해 툴롱(Toulon) 출신의 프랑스인 건축가 프랑수아 코르누(François Cornut)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유럽의 주요 항구와 무역 노선을 신설하고 모로코의 국가 위상을 선전하는 것 이였습니다. 시디 모하메드 벤 압달라 국왕은 모로코에 현대적이고 경쟁력 있는 대규모 항구를 건설하고 싶었습니다. 이 와중에 유명한 건축가이자 도시 계획가인 프랑수아 코르누는 1766년 라라슈(Larache) 재난 당시 포로로 잡혀왔던 상태였습니다. 그는 400명의 기독교인 포로들의 도움으로 이 도시를 요새화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도시의 레이아웃은 유럽 모델을 기반으로 했습니다. 시디 모하메드 벤 압발라는 정치와 전략에 대한 천재적인 재능 외에도 알라윗 왕조의 위대한 건축가 중 한 명이었어요. 그는 마라케시에 큰 애정을 보였는데, 카스바 지역의 건설 및 재건 공사와 아그달 정원 및 다양한 성역을 복원하는 작업을 수행했습니다. 또한 알 아자르 또는 알 루아 모스크, 베르다인 및 베니마 모스크, 시디 모하메드 벤 아이사 및 시디 부 오스만의 영묘 등 메크네스에 수많은 종교 건축물을 건축했습니다. 라바트에서는 알 수나 모스크의 기초 공사가 시작되었고 왕궁이 지어졌습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페즈시는 진정한 르네상스를 맞이했습니다. 여러 모스크와 연설장이 지어졌습니다. 그는 부아나니야 모스크도 복원했습니다. 시디 모하메드 벤 압달라가 손대지 않은 주요 도시는 없는 거의 없고 흔적은 모로코 전역에 걸쳐서 남아있습니다. 177-1780년 사이에 가뭄(1776~1782년)과 전염병 대유행(1797~1800년)으로 인해 모로코는 인구학적 대재앙과 대대적인 인구 이동이 발생했습니다. 가장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이 25년 동안 모로코 인구의 절반이 사망했으며, 이로 인해 많은 마을이 지도에서 사라지고 전염병의 영향을 덜 받는 지역으로 이주하는 이들로 인해 사회적 전반에 걸쳐 큰 위기가 닥쳤습니다. 16세기 초 500만 명에 달하던 모로코의 인구는 300만 명 이하로 감소했습니다. 그러나 이 재앙은 자우이아 족의 부활로 이어졌습니다. 1790년 시디 모하메드 벤 압달라가 사망하면서 모로코는 재건되었지만, 분열의 씨앗이 남아 자우이아 족의 세력이 커졌습니다.
물레이 야지드의 (Moulay Yazid, 1790-1792) 통치시대
시디 모하메드(Sidi Mohammed)의 후계자로 지명된 물레이 야지드(Moulay Yazid)는 아버지에 대한 일련의 반란과 반란을 일으키며 모험적이고 때로는 스캔들을 일으키는 삶을 살았습니다. 물레이 야지드의 짧은 통치 기간은 모로코 남부에서 일어난 봉기, 마라케시에서 술탄으로 선포된 형제 중 한 명, 수스(Souss)와 타필라렛(Tafilalet)에서 일어난 또 다른 형제들의 반란으로 특징지어집니다. 물레이 야지드는 엄청난 폭력과 잔인함으로 반응했습니다. 그는 약탈당한 마라케시를 탈환하고 반대세력을 학살했습니다. 그러나 그후 물레이 야지드는 전투에서 전사했습니다. 모로코는 1797년까지 분열된 상태로 위태로운 시기를 맞게 됩니다.
물레이 슬리만의 통치(Moulay Slimane, 1792-1822)통치시대
시디 모하메드 벤 압달라 술탄의 아들인 물레이 슬리만은 긴 통치 기간(30년) 초반에 모로코 남부 일부 지역에서 술탄으로 인정받은 물레이 히삼과 타필라렛의 또다른 영토에서 군림한 압데라흐마네라는 두 형제와 싸워야 했습니다. 그들에게 그의 승리한 이후에도 세 가지 새로운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1810년경에 발생한 산악 지역의 및 베르베르족 내란 위기(리프, 중부 및 북부 아틀라스, (Rif, Middle and High Atlas)), 자우이아(zaouias) 세력의 부활로 인한 종교적 위기, 마지막으로 앞선 두 위기가 종합된 왕권 위기가 그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물레이 슬리만은 특정 지역의 가문들(특히 Derkaoua와 Tijanya)과 손을 잡고 연합합니다. 리프 반란군은 1813 년경에 진압되었습니다. 베르베르족의 아이트 아타(Ait Atta) 부족은 1816년 타필라레(Tafilalet) 지역의 일부를 장악했습니다. 아틀라스 중부의 봉기는 이 지역의 모든 산하자(Sanhaja)와 제넷(Zenet) 부족이 아부 바크르 암하우치라는 아이트 시디 알리 지도자를 중심으로 단결한 가장 큰 봉기였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술탄에 대항하여 단결하고 젬무르(Zemmour) 세력과 합류했습니다. 1818년, 술탄의 군대는 이 연합군에 의해 패배했고, 물레이 슬리만은 포로로 잡혔으며 그의 아들 물레이 브라힘은 살해당했습니다. 나흘 간 포로로 잡혀 있는 동안 술탄은 이슬람 선지자(모하메드)의 후손으로서 반란군에 의해 풀려나기 전까지 존경받는 대우를 받았습니다. 이제 베르베르 산맥의 지배자가 된 암하우치(Amhaouch)는 1820년 페즈에 입성하여 술탄과 전쟁을 벌이고 있던 우에잔 세력의 지도자들을 만나서 동맹에 합의했습니다. 국제적인 측면에서 물레이 슬리만(Moulay Slimane)은 대외 무역이 감소한 1805년까지 시디 모하메드 벤 압달라(Sidi Mohammed ben Abdallah) 정책을 따랐습니다. 19세기 초, 이러한 경제적 쇠퇴는 모로코 빈곤의 큰 원인이며 그후 고립과 철수 정책이 시작되었습니다. 물레이 슬리만은 전임자들과 마찬가지로 종교 건축물의 건설과 복원에 착수했습니다. 페즈에서는 위대한 알-알시프 모스크인 밥 귀사(Bab Guissa) 성문과 메데르사(madrasa)를 세웠고, 위풍당당한 저택인 다르 물레이 슬리먼(Dar Moulay Slimane)의 건축을 맡기도 했습니다. 또한 페즈의 다르 알 마흐젠(dar al Makhzen)에서 요새에 성벽을 쌓는 일을 수행했습니다. 19세기 초, 라바트에는 알 쿠바(al-Qubba mosque) 모스크와 물레이 슬리만 모스크가 세워졌습다. 물레이 슬리만의 통치 말기는 중앙 권력의 약화 현상이 특징입니다. 1822년 술탄은 내전에서 다시 패배했고 승리자인 자우이아 체라디야(zaouia cherradiya)은 그를 죽이지 않고 풀어주었습니다. 마라케시로 돌아온 물레이 슬리만은 이제 모든 명성을 잃었고 조카 중 한 명인 동생 물레이 히삼의 아들 물레이 압데라흐만 벤 히삼(Moulay Abderrahmne ben Hicham)을 후계자로 선택했습니다.
Abderrahmane 압데라힘 (1822-1859) 통치시대
압데라힘 왕 재위 시기에 모로코는 유럽 강국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모로코가 Emir Abd al-Qadir(알제리 독립 운동 지도자)을 지지하고 그의 망명을 받아주자 1844 년에 Isly의 전투에서 프랑스 군에 의해 공격받고 패배하여 Emir Abd al-Qadir지지를 포기했다.
Muhammad IV (1859-1873)와 Hassan I (1873-1894)의 통치 기간에 알라윗 왕조는 무엇보다도 유럽 국가와 미국과의 무역 관계를 장려했다. 베르베르 족과 사하라 베두인 부족에 대한 통제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프랑스 군대의 긴밀한 협조 하에 모로코 군대 및 행정부 근대화에 착수했다. 모로코 북부를 정령하고 있었던 스페인과의 전쟁(1859-1860) 패배 후 서유럽 여러 나라들이 모로코 문제에 직접적으로 관여하기 시작했다. 마드리드 조약(1880)에서 모로코의 독립성이 보장되었지만, 프랑스는 더 큰 영향력을 얻었다. 이처럼 커져가는 영향력에 대응하기 위한 독일의 모로코 영향력 시도(1905-1906년)로 인해서 모로코는 첫 번째 위기와 1911년의 두 번째 모로코 위기를 초래했습니다. 1906년 스페인 남부 알헤스라스(Algecira)에서 열린 협상에서 서유럽 강대국들(영국-프랑스-스페인-독일) 간에 가까스로 외교적 타협을 보았다.
결국 모로코 국왕은 1912년 12월 3일에 페스(Fes)조약에 서명을 통해 프랑스 보호령을 인정해야만 했다. 동시에 북부 모로코의 Rif 지역은 스페인 지배하에 들어갔다. 모로코는 그후부터 프랑스의 지배하에 있다가 1956년 3월 2일에 드디어 독립했다.
Sidi Mohammed ben Abderrahmane 또는 Mohamed 4세 (1859-1873) 통치시대
모하메드 4세는 그의 아버지가 살아 있는 동안 그의 직위와 총독으로서의 역할 때문에 그의 아버지에 의해 후계자로 지정되었습니다. 사실 모하메드 4세는 이미 오래전부터 사업에 착수해 있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그는 유럽 강대국들과 계속 대결하면서 그들의 경쟁을 이용했다. 그는 본질적으로 그의 통치 초기에 직면해야 했던 스페인과의 전쟁을 제외하고는 열강들의 경제적 사업에 대한 소극적인 저항을 제공했다.
이 사건은 Anjra 반란 동안 스페인 무기를 표시한 북부의 국경 표지가 파괴되면서 촉발되었다. 스페인이 1860년 2월 6일 테투안(Tetouan)을 점령하는 데 필요한 것은 이것이 전부였다. 세우타(Ceuta) 평화 조약(1860년 4월 26일)의 많은 조항 중 하나는 모로코가 2천만 Douros라는 참혹한 전쟁 배상금을 지불하도록 규정했다. 이 금액을 지불할 수 없었고 특히 이 새로운 굴욕이 불러일으킨 산발적인 반란에 당황한 모하메드 4세는 영국 은행으로부터 급하게 돈을 차용해야 했고 이로 인해 두 나라간 무역 관세서약에 매우 불리하게 작용되었다. 영국과 스페인은 모로코의 정치적, 경제적 위기를 통화 위기로 점차 악화시켰다. 그 이후로는 차관이 뒤따랐고, 이는 제국의 재정에 문제를 일으켰고, 유럽의 영향에 개방함으로써 제국의 독립에 반복적인 타격을 가했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 모로코는 군사적으로도 무력한 상태에서, 유럽열강국가들이 이 상황을 이용하고 그들의 요구와 이권을 집요하게 강요했다.
이러한 상황은 19세기 후반에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나라를 크게 불안정하게 했고, 모하메드 4세가 직면해야 했던 수많은 반란을 불러일으켰다.
한편, 그의 선대왕들과 마찬가지로 모하메드 4세는 그의 화려한 건축 작품으로 그의 통치를 표시했습니다. 또한 그의 통치 기간 동안 Jnan Redouan과 Menara의 파빌리온, 마라 케시의 Sidi Bel Abbas의 분수, 라바트의 왕궁이 세워졌습니다. 모하메드 4세는 또한 마라케시에 탄약 공장을, 페즈에 무기고를 건설했다.
Moulay al Hassan(물레이 알 하산) 또는 하산 1세의 (1873-1894) 통치시대
아버지 모하메드 4세의 생전에 남부에서 술탄의 칼리파로 일했던 물라이 알 하산이 그의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그는 모로코가 알고 있는 가장 위대한 군주 중 한 명이었으며, 그의 경건함과 냉철함으로 인해 큰 명성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그의 왕위 계승은 모로코 사회가 경험한 그의 통치 이전에 깊은 불안으로 촉발된 반란으로 표시되었습니다. 페즈에서는 무두장이들이 그에게 맹세하기를 거부했고, 메크네스(Meknes) 지역에서는 부족들이 봉기했다.
하산 1세는 곧 이 반란을 진압하고 중부 아틀라스를 평정했다. 그의 작품의 폭과 모든 분야에 걸친 혁신적인 아이디어는 이 알라위 술탄을 위대한 통치자로 만들었다. 북아프리카의 불리한 정치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기술, 용기 및 선견지명 덕분에 평화를 유지하고 독립을 수호할 수 있었다. 모로코를 현대화하고 자원을 더 잘 활용하기 위해 하산 1세는 학생들을 해외로 보내고 마흐젠을 조직하는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혁신을 이루었다. 수입의 필요성을 줄이기 위해 산업과 농업이 장려되었다. 항구를 개발하기 위한 주요 작업이 수행되었다.
철도와 교량도 내륙에 건설될 예정이었기 때문에 유럽의 산업가들과의 경쟁이 치열해졌다. 우편 서비스와 전신은 영국인과 프랑스인이 공유했습니다. 탕헤르 부근의 석탄, 수스 (Souss)의 납과 구리, 세우타 (Ceuta) 근처의 안티몬, 제벨 하디드 (Djebel Hadid)의 철 등 심토의 풍요로움이 착취되기 시작했다.
그의 최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개발 작업은 오해를 받았고 세기 말에 이르러 재정 문제가 발생하여 차입이 불가피하고 파멸적이었습니다. 하산 1세는 유럽이 이미 승리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비교적 평화로운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나라는 여전히 복종하였다.
유럽 열강의 제국주의가 성장하고 물레이 알 하산이 직면해야 했던 내부 반란에도 불구하고 건축 작업은 무시되지 않았습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세워진 많은 건물 중에는 마라케시시, Bab Chkirou (1873-1874)가 있습니다.
살레 (Salé)시, 유명한 Dar Sbihi와 Dar Aouad의 부유한 거주지; Meknes시, Sultan Dar Abdallah Jamai (현재 박물관) 장관의 거주지 및 caïd Mechouar Dar bel Allam의 거주지; 페즈 (Fez)시의 시디 아메드 벤 야 히아 모스크 (Sidi Ahmed ben Yahya mosque)는 1882-1883 년에 큰 모스크로 확대되어 변형되었으며, 1890 년에 지어진 다르 알 바이다 궁전 (Dar al Bayda palace)은 하산 1 세의 작품이며, 술탄 다르 바타 (Sultan Dar Batha)의 여름 궁전은 1897 년 물레이 압드 알 아지즈 (Moulay Abd al-Aziz)와 무기 공장 또는 마키나 (Makina) (무기고)에서 완성되었습니다. 1885 년 Fez Jdid에 지어졌습니다.
Moulay Abd al-Aziz 물레이 압드 알 아지즈 (1894-1908) 통치시대
하산 1세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왕위 계승 문제가 다시 불거졌다. 그러나 바 아흐메드(Ba Ahmed)로 알려진 강력하고 웅장한 고관 벤 무사(Ben Moussa)의 압력으로 14세의 아브드 알 아지즈는 1894년 울레마와 상의하지 않고 술탄으로 선포되었다. 이 "부과된" 즉위에 대한 극악무도한 반대, 특히 페즈의 많은 저명인사들은 법원을 마라케시로 옮기도록 강요했습니다. 많은 반대자들은 아브드 알 아지즈의 형인 물레이 모하메드가 왕좌에 오르는 것을 보고 싶어했을 것이다.
6년 동안 권력의 실체는 바아흐메드(Ba Ahmed)가 권력을 행사했고, 물레이 하산(Moulay Hassan)의 미망인인 체르케스인 랄라 르키야(Lalla Rqiya)의 지원을 받았다. 그는 내륙에 질서를 가져왔고 강대국들, 특히 프랑스와 영국의 경쟁을 이용하여 모로코에 대한 그들의 지배를 지연시켰다. 그러나이 고관은 모로코가 다음 해에 겪어야 하는 심각한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그는 궁전에 갇힌 젊은 술탄의 교육을 소홀히 했으며, 왕자와 미래의 군주에게 필요한 지식과 훈련을 받지 못한 채 편안하게 자랐습니다. 그의 소홀한 교육과 마흐젠이 경쟁 씨족으로 나뉘었기 때문에 그는 유럽 기술의 참신함에 매료된 폭력적이지만 약하지 않은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테니스를 쳤고, 자전거, 자동차, 피아노, 축음기, 카메라로 둘러싸여 있었다.
1900년 바 아흐메드가 사망하자 20세의 물레이 압드 알 아지즈가 왕위에 올랐다. 그의 즉위와 함께 모로코의 독립 상실로 이어질 심각한 혼란의 시기가 시작되었다는 것이 국내적으로나 외교적으로 발표되었습니다. 물레이 압드 알 아지즈의 유럽의 기술 혁신에 대한 뚜렷한 취향과 그에 따른 엄청난 비용은 이맘으로서의 의무를 수행할 수 없는 무능력에 더해져 그와 그의 백성 사이의 격차를 벌리고 그의 위신을 크게 손상시켰다. 사람들은 이러한 혁신이 이슬람의 교훈에 어긋나고 종교에 위험한 혁신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고립과 전통으로의 회귀만이 이 나라에 활력과 힘을 회복시킬 수 있다고 확신했다.
젊은 통치자가 농업 재산에 대한 세금인 테르티브(tertib)와 같은 진정으로 혁명적인 개혁을 단행했을 때 불만은 깊어졌다. 아브드 알 아지즈(Abd al-Aziz)는 전통적인 코란세를 이 새로운 세금으로 대체하기로 결정했는데, 이는 부유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겸손한 사람들도 납부해야 했기 때문에 평등주의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결정은 특권층과 서민 모두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술탄은 자신의 운명을 위협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적대감, 특히 고위 관료들의 적대감과 유럽 열강의 압력 때문에 개혁을 수행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20세기의 시작은 모로코의 재정 위기가 가속화된 혼란의 시기와 함께 시작되었다. 1902년에 모로코 재무부에 7,500,000 프랑 상당의 돈을 빌려준 Banque de Paris et des Pays-Bas의 이익을 위해 차입 기간이 빠르게 열렸습니다. 1년 후, 같은 액수의 돈을 두 번이나 빌렸는데, 처음에는 영국 은행에서, 그 다음에는 스페인 은행에서 빌렸다. 이 차관은 술탄의 빚을 갚고, 적군에 대한 군사 작전을 수행하고, 주요 공사에 장비와 서비스를 제공한 외국 회사에 사용되었습니다. 그때부터 각 대출은 주로 이전 대출을 상환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모로코 정복을 촉진하기 위한 식민지 음모와 밀접하게 연결된 보호령 전야에 반란은 반대 의견으로 변질되었고 불안은 악화되고 널리 퍼졌습니다. 실제로, 중앙 권력의 약화를 이용하여, 프랑스는 1890년 이래 모로코 사하라 사막에서 이미 착수된 행동을 강화했다. 1903년, 지중해에서 베니-압바스에 이르는 국경의 "평정을 보장"하기 위해 리요테가 알제리의 장군으로 부름을 받고 임명되었을 때, 서쪽으로 모로코 영토로 향하는 프랑스의 미묘한 진격이 더욱 두드러졌다. 1908년, 프랑스는 이제 알제리 국경과 물루야 사이의 전 지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더욱이 20세기 초의 제국주의 경쟁에서 모로코에 대한 우위를 보장하기 위해 프랑스는 1904년 영국과 일련의 협정을 체결한 후 스페인과 약간의 양보를 대가로 서명했다. 이러한 협약에서 체계적으로 배제되고 모로코에 이해관계가 있는 독일은 술탄에게 프랑스의 압력에 굴복하지 말고, 모든 제안을 거부하고, 무엇보다도 모로코에 관심이 있는 모든 강대국의 회의 소집을 요구함으로써 불만을 표시했다. 1905년 3월 31일 빌헬름 2세가 탕헤르(Tanger)에 도착하여 물레이 압드 알 아지즈의 주권과 독립을 인정하고 모로코의 권력 간의 평등을 위협할 수 있는 모든 것에 반대한다는 것을 확인한 수많은 선언은 유럽의 긴장 과정을 촉발했습니다.
술탄의 요청과 독일의 압력으로 이러한 긴장은 1906년 1월 7일부터 4월 6일까지 스페인의 알헤시라스(Algeciras)에서 개최된 13개국이 모이는 국제 회의를 촉발했습니다. 독일은 고립되어 있었고 영국은 프랑스를 지원하여 모든 혜택을 누렸다. 모로코의 독립과 완전성이 인정되었고 프랑스는 라바트(Rabat), 마자간(Mazagan), 사피(Safi), 모가도르(Mogador)를 장악했다. 스페인은 테투안(Tetouan)과 라라체(Larache)를 얻었고 카사블랑카(Casablanca)와 탕헤르(Tanger)를 프랑스와 공유했다. 모로코를 일종의 "국제 보호령"하에 두면서 알헤시라스 조약은 모로코의 독립을 실질적으로 끝냈습니다.
모로코에서 이 조약은 술탄과 마흐젠을 타성과 배신이라고 비난한 전체 국민의 불만을 불러일으켰다. 도처에서 폭동이 일어나 술탄의 관리들과 유럽인들을 위협했다. 프랑스는 이 사태로 인해 프랑스와 모로코 사이에 일어난 사건을 이용하여 1907년 카사블랑카와 1908년 차우이아 전역을 시작으로 모로코 동부 우즈다(Oujada)를 시작으로 모로코에 대한 군사 점령에 착수했다.
Moulay Abd al-Aziz의 통치는 그의 전임자들과 마찬가지로 건축 작품의 건설과 완성을 보았습니다. 물레이 알 하산(Moulay al Hassan)의 여름 궁전인 페즈(Fez)에서는 다르 바타(Dar Bata)가 완공되었고, 다르 메네비(Dar Menebhi), 다르 글라우이(Dar Glaoui), 다르 알 모크리(Dar al-Mokri)가 세워졌습니다. 마라케시에서는 바이아 (Bahia)와 다르 시 사이드 (Dar Si Saïd) 궁전이 지어졌고 메크 네스 (Meknes)에서는 다르 베 나니 (Dar Benani)가 지어졌습니다.
Moulay Hafid 물레이 하피드 (1908-1912) 통치시대
모범적인 경건함으로 명성을 얻은 아브드 알 아지즈의 형인 물레이 하피드는 카사블랑카 사건 이후 1907년 8월 16일 마라케시에서 술탄으로 선포되었습니다. 페즈에서 그는 성전을 수행하겠다는 약속으로 갈채를 받았고 페즈의 울레마는 그에게 알헤시라스 협정을 파기하고 차우이아와 동부 모로코에서 프랑스를 몰아낼 것을 요청했습니다. 아브드 엘 아지즈는 그 후 폐위되었다. 물레이 하피드는 권력을 잡았지만 권력을 행사할 수 없었고, 무엇보다도 약속을 지킬 수 없었다. 그는 군대 분야에서 지배권을 강요하는 프랑스와 무익한 협상을 시작했고, 카사블랑카와 차우이아의 보복 작전에 대한 막대한 배상금을 요구했다. 물레이 하피드는 지하드를 포기해야 했고, 다시 한번 모로코 국민과 울라마를 분노케 했다.
스페인은 이 상황을 이용하여 북쪽에서 스페인과 모로코 사이에 일어난 사건을 계기로 리프 제도의 일부를 침공했다. 프랑스는 이미 많은 돈을 '투자'한 나라에서 이러한 불안정과 유혈 반란의 분위기를 용납할 수 없었고, 1911년 5월 4일 물레 하피드는 샤리피아의 권위를 유지하면서 평화를 회복하고 불안과 불안의 원인을 제거하기 위해 프랑스의 도움을 요청하는 4월 17일자 프랑스 정부에 보내는 서한에 서명하도록 강요했다. 수도 페즈의 성문은 이제 열렸고 Moinier 기둥은 1911 년 3 월 21 일에 도시에 들어갔습니다. 메크네스는 6월 8일에, 라바트는 7월 9일에 투자되었다.
프랑스의 점령에 스페인은 라라체(Larache)와 엘 크사르 엘 케비르(Ksar El-Kebir)를 점령함으로써 대응했다. 프랑스의 모로코 침공에 대한 반대를 멈추지 않았던 독일은 1911년 7월 1일까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고, 수스에 대한 경제적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순양함 팬더를 아가디르(Agadir)로 보냈다. 적어도 그것은 공식적인 구실이었다. 사실, 그것은 프랑스가 처벌받지 않고 모로코를 차지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문제였습니다. 독일을 "달래고" 곧 공식적으로 모로코에 대한 프랑스의 보호령이 될 것을 인정받기 위해, 프랑스는 보상을 제공하기로 결정했다. 1911년 11월 4일, 베를린 조약에 의해 독일은 프랑스의 보호령을 인정했지만 콩고의 일부를 받았다.
더 이상 유럽 식민지 열강의 개입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고, 물레이 하피드를 외교적으로 고립시킬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프랑스는 이제 모로코에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게 되었다. 1912 년 3 월 24 일, 탕헤르 (Tangier)의 프랑스 장관 인 레노 (Regnault)는 술탄이 보호령 조약 또는 페즈 조약에 서명하도록하는 임무를 가지고 페즈에 도착했습니다. 5,000명의 프랑스 병사들이 궁전 벽 아래에 진을 치고, 왕국의 서쪽과 동쪽의 넓은 지역을 점령하고,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던 무정부 상태의 분위기로 인해 물레 하피드는 1912년 3월 30일 보호령 조약에 서명하는 데 동의했습니다. 이 서명은 특히 페즈 시에서 유혈 전투의 물결을 일으켰습니다. 평화 협상이 예상만큼 쉽지 않자, 파리의 각 부처는 의지가 강한 위베르 뤼테이를 파견하여 모든 군사 및 행정 문제를 해결하기로 결정했다. 모로코의 첫 번째 주재 장군으로서 그는 1912년 9월 마라케시와 1914년 타자를 점령하여 5월에 페즈에서 평온을 회복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리요테(Lyautey) 총독는 수도를 라바트로 이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프랑스의 주장에 따라 술탄은 "건강상의 이유로" 퇴위하고 Lyautey 총독이 지목한 그의 동생 Moulay Youssef가 왕위에 즉위하게되었다. 물레이 하피드는 퇴위하는 대가로 연간 375,000프랑의 연금과 40,000파운드의 수표를 받았다.
프랑스 보호령 (1912-1956)의 Moulay Youssef 물레이 유세프 (1912-1927) 통치시대
마흐젠은 물레이 유세프를 술탄으로 인정해야 했고, 리요테(Lyautey) 통독은 그의 의지대로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맘이자 칼리프였던 술탄은 자신의 명성의 모든 속성을 유지했으며 그의 영적 힘은 그대로 유지되어 Lyautey 측에서 진지한 존경의 대상이었습니다. 입법권, 행정권, 사법권에 관해서는, 그는 관저가 그에게 제시한 다히르(법안)에 서명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마찬가지로, 공무원을 임명할 때, 그는 위원회가 그에게 제출한 명단을 제외하고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마크젠은 계획대로 개혁되었다. 그것은 단지 겉치레의 역할만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레지던트의 행정 하에 모로코를 현대화로 이끌어야 하는 시스템의 주변부에 유지된 낡은 질서의 생존이다.
후자는 모로코에서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를 명확하게 구분하면서 "진정한 국가, 예외적으로 풍부한 과거, 독창적 인 구조 및 문명을 가진 민족"에 직면해 있음을 빠르게 이해하고 선언했습니다. 보호령이 필연적으로 모로코의 독립으로 이어질 과도기적 국가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던 리요테(Lyautey) 총독은 이 후 13년 동안 이 방향으로 행동해야 했으며, 무엇보다도 군벌이었을 뿐만 아니라 외교적이고 모로코의 정체성을 존중하는 지적인 행정가였다. 또한 모로코 건축과 예술품에 대한 그의 존경심은 모범적이었습니다. 교양 있는 탐미주의자로서 그는 도시가 개발되고 주요 프로젝트 중에 도시가 존중되고 문화 유산이 보호되도록 했습니다.
프랑스 보호령의 설립과 Lyautey의 존재는 불안이 지속되는 것을 막지 못했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모로코의 저항은 공고해지고 있었다. 실제로 무장 저항은 매우 중요하고 매우 길었다. 부족들은 힘의 불균형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군대의 도착과 기독교 세력에 의한 식민지화를 반응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1934년까지 일부 지역에서 저항하다가 마침내 모로코가 평화로워졌다고 생각했다. 그 후 정치 의식은 도심에서 발전했고, 그 투쟁은 그때부터 본질적으로 정치적이었다.
1927년, 술탄 물레이 유세프가 사망했다. 그의 세 아들 중 막내인 시디 모하메드 벤 유세프는 18세의 나이로 모하메드 5세의 이름으로 술탄으로 선포되었다.
Mohamed V 모하메드 5세의 통치와 민족 해방 (1927-1961)
술탄 물레이 유세프가 사망하자 그의 세 아들 중 막내가 1927년 11월 18일 금요일에 모로코의 술탄으로 선포되었습니다. 이 무렵 보호령 조약은 이미 15년이 지났고, 군사적 저항은 거의 모두 무너졌으며, 리프 전쟁은 끝났고, 세계 식민주의는 "황금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모하메드 5세는 정치적 비상사태가 1927년의 독립, 유토피아가 아니라 모로코의 통합과 정체성을 수호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재빨리 이해했다. 그의 통치 첫 20년 동안 그의 최우선 과제는 모로코 보호령이 식민지로 전락하는 것을 막는 것이었다. 실제로 모하메드 5세는 1912년 조약이 그에게 부여한 것의 어떤 부분도 양도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1944년부터 모하메드 5세의 모든 행동은 모로코의 독립을 목표로 했다. 전적인 결단력과 대단한 정치적 감각으로 두 가지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군주는 모로코의 국가 통일이나 주권에 관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고 비타협적이었습니다.
이러한 비타협적인 태도의 많은 예들 중 하나는 프랑스군이 패배한 후, 비시 정부가 프랑스와 알제리에서 시행된 반 유태주의 법률을 모로코로 확대하기를 원했을 때였다. 술탄은 모로코에 살고 있는 유태인들은 모로코의 신민이며, 그들에게 특별법을 적용하려는 시도는 모로코의 국가 통합과 주권 분야에서 용납할 수 없는 선례를 남길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이에 근본적으로 반대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여파로 프랑스의 위신은 손상되었고, 대서양 헌장은 모든 국민이 자신이 원하는 정부 형태를 선택할 권리를 선언했습니다. 술탄 모하메드 5세가 프랑스로 가서 드골 장군이 모로코 해방의 한 형태에 대해 생각해보겠다고 약속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다.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는데, 1946년 드골이 사임하고 역대 정부들이 이 새로운 상황을 고려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로코에서 민족주의자들은 더 이상 개혁을 요구하지 않고 독립을 요구하고 있다. 1943년에 창당된 이스티크랄(독립당)은 현재 모하메드 5세의 측근들과 권력은 없지만 포럼인 정부 평의회에서 강력한 존재감을 드러내며 정치 생활을 지배하고 있다.
모하메드 5세는 1951년 프랑스를 다시 방문하여 1912년 보호령 조약을 종식시킬 것을 정부에 요청했다. 프랑스 정부가 제안한 일련의 개혁은 모로코에 대한 공동 주권, 즉 독립에 반대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모로코로 돌아오자마자 항의의 표시로 모하메드 5세는 "인감 파업(서명 거부)"을 결정했는데, 이는 프랑스 거주자인 주앙 장군이 공포하기 위해 제출한 다히르(Dahir, 왕령)가 더 이상 비준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상황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후인 장군은 모하메드 5세에게 사임할 것을 요청했다. 1950 년 12 월 23 일 토요일, 프랑스의 충실한 동맹국 인 마라 케시 타미 알 글라우이 (Marrakech Si Thami al-Glaoui)의 파샤 (Pasha)는 모하메드 V (Mouloud)를 계기로 모하메드 V (Mohammed V)에게 자신의 소원을 제시하기 위해 궁전에 갔고 그는 군주에게 Istiqlal의 구성원에 의해 영향을받지 말라고 요청했습니다. 모하메드 5세는 무례하게 그를 해임하고 대관을 통해 추후 통지가 있을 때까지 궁전에 대한 접근을 금지한다고 통보했습니다. 1951년 2월, 술탄이 "봉인 파업"을 중단하도록 강요하기 위해, 그리고 거주지의 동의와 물질적 지원을 받아, 알 글라우이는 수천 명의 부족 기병을 페즈와 라바트로 보냈다. 모하메드 5세는 2월 23일 내전을 촉발할 위험이 있는 이 쿠데타에 직면하여 항복했다.
절망에 빠진 모하메드 5세는 1952년 11월 "왕좌로부터의 연설"에서 모로코의 즉각적인 해방을 요구했다.
이 절망적인 행동은 프랑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8월 14일과 15일에 군주는 하산 왕세자와 함께 체포되어 코르시카와 마다가스카르에서 2년 이상 망명하기 위해 프랑스 군용기에 탑승했다. 8월 15일, 알라위 가문의 셰리프인 모하메드 벤 아라파(Mohammed ben Arafa)는 글라우이(Glaoui)가 저택에 제안한 "왕위 후보자"로 마라케시에서 "신실한 왕자"로 선포되었다. 모로코 국민들은 분노에 휩싸였고 테러 행위는 증가했다. 상황이 악화되고 심각한 문제, 특히 1954년 5월 디엔비엔푸의 함락이나 같은 해 가을 알제리 전쟁의 발발을 보고 프랑스는 행동에 나서기로 결정했다.
1955년 8월 22일, 한편으로는 술탄과 다른 한편으로는 민족주의자들과 비공식적인 접촉이 이루어진 후, 엑상레뱅에서 회의가 시작되었다. 프랑스-모로코 관계의 미래에 대한 협상의 기초를 마련하기 위해 왕위 위원회와 모로코 정부를 창설하기로 결정했습니다. 9월 8일, 모하메드 5세가 승인한 모하메드 빈 아라파는 10월 1일에 퇴위했고, 9월 26일에는 이스티크랄(독립정)이 합법적인 술탄의 귀환을 요구했다. 1955년 11월 1일 프랑스에서 에드가 포레(Edgar Faure) 프랑스 의회 의장과 앙투안 피네(Antoine Pinay) 외무부 장관과 함께 시작된 협상 끝에 모하메드 5세는 프랑스가 보호령 정권을 종식시키고 모로코의 완전한 독립을 회복하는 "라 첼 생 클라우드 선언"을 얻어냈다. 11월 10일, 모하메드 5세는 환호 속에 모로코로 돌아왔다.
1956년 3월 2일 금요일, 프랑스는 모로코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문서에 서명했다. 4월 7일, 스페인이 왕국 북부에 대해 행사한 주권을 포기한다는 선언이 서명되었다. 10월 29일, 탕헤르 지역은 모로코에 재통합되었다.
모하메드 5세의 통치 기간 동안 모로코는 독립을 되찾았고 군주는 술탄 대신 왕의 칭호를 받았습니다. "해방되고 사랑받는 술탄"인 모하메드 5세는 1961년 2월 26일 수술 중 갑작스럽게 사망했습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마자 모로코는 가장 큰 고통에 빠졌다.
19세기와 20세기 알라윗 왕조 시대의 작품
모든 알라위 술탄은 건축 작품으로 그들의 시대에 흔적을 남겼으며, 그 세부 사항은 각 통치에 대해 위에서 되짚어 보았습니다. 그들의 정치적 노력은 결코 건축 건설에서 그들을 산만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알라위 예술은 이미 알라위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공식의 반복에 의존하고 있다. Moulay Slimane (1792-1822), Moulay Abderrahmane (1822-1859) 또는 Moulay al Hassan (1873-1894)과 같은 군주들은 모두 이전 시대의 업적을 영속시키면서 건축 및 장식 세부 사항으로 기존 레퍼토리를 풍부하게 하는 데 애착을 드러내는 단일 작품을 남겼습니다.
이 작품들은 makhzen의 유명 인사와 주요 도시의 부유한 상인들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 영향은 토목 건축, 특히 새로운 기여를 더 잘 받아들이고 창조의 르네상스를 허용한 고위 인사의 부유한 거주지에서 매우 분명합니다. 참신함은 주로 다양한 스타일을 낳는 벽돌과 장식에서 나타납니다.
왕조, 종교 및 시민 건축 (대형 모스크 및 궁전)은 스타일의 진정한 통일성을 보여 주었지만, 작은 웅변가의 건축과 부유한 고위 인사의 집에서는 3 개의 지역 학교를 구별할 수 있습니다. Fez-Meknes의 것은 Merinid 유산에 대한 충실도를 보여줍니다. 라바트 살레 (Rabat-Salé)의 것은 알 모하드 (Almohad) 전통과 건축 및 석조 작품 (조각, 조각)을 스페인 르네상스 (Moriscos에 의해 17 세기에 도입됨)의 특정 주제와 반원형 아치의 풍부한 몰딩과 결합합니다. 여전히 심오한 웅장함을 목격하는 마라케시 학교는 다색성의 자원이 결합된 벽돌과 어도비 건물에 충실합니다.
도시의 예술적 창조 (도자기, 자수, 태피스트리, 보석류, 청동 예술 등)는 안달루시아 인과 모리스코의 공헌으로 풍요로워진 중세로부터 물려받은 형태에 충실하면서도 정적으로 남아 있지 않고 새로운 조합을 통해 세부 사항을 풍부하게 했습니다.
농촌 환경의 예술은 도시 생산과는 매우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매우 풍부하고 다양합니다. 밝은 색상의 카펫은 거의 독점적으로 기하학적 패턴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때로는 매우 상징적입니다. 도자기는 형태의 우아함이 뛰어납니다. 무기와 장신구의 생산은 기술의 완벽한 숙달과 매우 다양함을 보여줍니다.
20세기 모로코 건축 예술은 긴 여정의 결과입니다. 이제부터 전통 건축의 장인들은 모로코에 이미 뿌리를 내린 공식인 이전 시대의 업적을 영속시킵니다. 그러나 그들은 새로운 건축 및 장식 세부 사항으로 기존 레퍼토리를 풍부하게 하는 데 특별한주의를 기울였습니다.
모로코의 건축가와 예술가는 일반적으로 새로운 기여를 수용하기 때문에 전통적인 형태에 대한 애착이 뿌리 깊게 남아 있더라도 창작의 르네상스를 허용합니다. 건축에서 참신함은 주로 석조물과 장식에서 나타나며 다양한 스타일을 낳습니다. 따라서 보호령 기간 동안 모로코 건축은 유럽의 예술 운동, 특히 순수한 기하학적 선을 가진 아르 데코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 영향은 장식적인 참신함으로 이미 수천 년 된 공식을 가진 건축물에 "접목"되었기 때문에 피상적이었습니다. 카사블랑카와 라바트의 많은 건물에는 이러한 혁신이 있습니다. 표준화에 굴복하기는 커녕 모로코의 전통 건축 예술은 그 정체성을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1912 년 보호령이 출현한 이래 모로코에서 도시 계획 개념과 Lyautey의 몇 가지 입법 조치를 구현한 것은 모로코 메디나와 역사적인 중심지가 이슬람 세계에서 가장 잘 보존되어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조치로 모로코 유산의 상당 부분을 보호할 수 있었습니다.
이른바 전통예술은 20세기 초에 격변을 겪었다. 1912년 보호령이 수립되었을 때, 새로운 유럽 물건의 도착, 플라스틱 및 특정 화학 제품의 도입, 중국 도자기의 수입은 모로코인들의 습관을 뒤엎고 장인, 특히 도예가와 도예가의 취향을 타락시켰습니다. 따라서 20세기 초에 도자기 산업은 동력이 고갈되기 시작했으며, 품질, 기술 및 빈곤한 장식 레퍼토리가 더 이상 이 전통 예술의 위대함을 반영하지 않는 물건을 만들었습니다. 모로코, 모로코의 문명과 예술에 대한 Lyautey의 사랑 덕분에 많은 조치가 취해졌습니다.
토착예술서비스(Indigenous Arts Service)는 도자기와 모든 모로코 전통 예술에 대한 위험을 빠르게 인식하여 아름다운 오래된 작품이나 전체 컬렉션을 수집하고 여러 박물관을 설립하고 수많은 전시회를 조직했습니다. 그들의 목표는 장인의 모델이 될 수 있는 예술적, 문화적 유산을 보존하고 일반적으로 모로코의 조상 전통의 복원을 자극하고 자극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이니셔티브 덕분에 예술, 특히 도자기의 진정한 르네상스가 일어났고 Al-Amali(1890년 알제에서 태어남)와 Al-Sarghini와 같은 예술가들은 새로운 모양과 패턴을 재창조하거나 모로코인과 외국 대중의 취향에 새로운 기술을 도입했습니다.
Hassan II 하산 2세(1961-1999) 통치시대
1961년 3월 3일, 하산 2세가 즉위하여 정치적으로 안정된 나라를 물려받았다. 아버지의 주도권을 영속화 하면서, 그는 술탄의 칭호를 왕의 칭호로 확실히 포기했으며, 이는 당시의 언급에 더 부합했습니다. 진정한 정치의 거장인 하산 2세는 어린 시절부터 그를 권력과 연관 지었던 아버지 모하메드 5세에 의해 훈련되고 준비되었다. 1999 년 7 월 23 일 사망으로 끝난 긴 통치 기간 동안 하산 2 세 왕은 오래되고 엄숙한 "Cherifian(체리피아) 제국"을 현대의 "모로코 왕국"으로 바꾸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통치 초기부터 젊은 군주는 왕국의 제도를 현대화하는 일에 착수했습니다. 그의 정책은 모로코의 전통과 뿌리를 보존하면서 현대 세계에 적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아들 모하메드 6세에게 물려준 나라는 그가 물려받은 나라와는 완전히 달랐다. 처음에는 더 큰 나라였는데, 그의 통치 기간 동안 1969 년 시디 이프니 (Sidi Ifni), 1975 년 사키아 알 함라 (Saquia al Hamra), 1979 년 우에드 알 다합 (Oued al Dahab)과 같은 세 개의 이전 스페인 영토로 확대되었으며, 후자의 두 그룹은 서부 사하라를 구성했습니다. 후자 덕분에 모로코는 현재 2,500km 이상의 대서양 해안선을 소유하는 해양 강국이 되었습니다. 둘째, 정치적, 경제적 무게중심이 서쪽으로 이동한 나라, 모로코는 철수 단계에서 벗어났다. 이 개방은 모로코의 심장부를 페즈 또는 마라케시에서 라바트와 카사블랑카로 확실히 이전하는 것을 동반했습니다. 마침내 정치적 교체가 현실이 된 민주주의 국가가 되었습니다. 실제로 1992년의 헌법 개정은 국무총리의 제안에 따라 주권자가 장관을 임명할 수 있도록 규정했기 때문에 실질적인 권력 변동을 가져왔다.
1996년에 두 번째 개혁을 통해 이 나라는 두 개의 의회를 갖게 되었고, 그 중 하나는 보통선거로 선출되었습니다. 따라서 모로코는 현행 헌법 제1조에 명시된 대로 "모로코는 입헌, 민주주의 및 사회 군주국이다"라고 명시된 대로 법의 지배를 받는 진정한 국가가 되었습니다. 1998년 3월, 국왕 하산 2세는 자신의 오랜 사회주의 정적이었던 압데라흐마네 유수피를 총리로 임명하기까지 했다.
하산 2 세의 통치는 또한 기후 위험의 결과를 제한하는 것이 경제적 목표였던 거대한 댐 건설 프로그램으로 특징 지어졌습니다. 후자는 국가 경제의 가장 중요한 부문인 농업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모로코에서 가뭄은 주기적입니다. 따라서 왕은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매년 새로운 저수지의 개통식을 볼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 정책은 완료되었으며 이것은 강조해야 할 큰 성공 중 하나입니다. 국제정치학적으로도 하산 2세의 업적은 매우 중요했다. "모로코는 아프리카의 토양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유럽의 바람에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덕분에 숨을 쉬는 나무를 닮았다 "는 말이 그가 즐겨 되풀이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모로코의 뿌리는 대부분 사하라 사막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 스페인령 사하라 사막의 회복이 하산 2세에게 타협할 수 없는 명분이었던 이유이다. 1975년, 스페인의 망설임과 알제리의 책략에 대한 우려에 직면한 하산 2세 국왕은 식민지 분할 기간 동안 잃어버린 국토의 이 부분을 평화롭게 되찾기 위해 수십만 명의 남성과 여성을 보내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1975년 11월 6일 목요일, 행진이 시작되었다. 수십만 명의 행진자들이 이끄는 "녹색 행진"이었고, 코란 손에 모로코 국기가 많았습니다. 비무장 민간인 군중에게 발포 명령을 내릴 수 없는 기정사실에 직면한 스페인은 11월 14일 모로코, 모리타니, 스페인 간의 삼자 협정에 서명했는데, 이 협정은 모로코와 모리타니 사이의 이전 스페인 식민지를 분할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모로코에서는 북부, 즉 Saquia al Hamra, 모리타니에서는 남부 또는 Oued ad Dahab이 있습니다. 하산 2세는 뛰어난 지략과 심오한 현실주의로서 서사하라 남부를 우방국인 모리타니에 "포기"하는데 동의했는데, 이는 사하라 유사 국가의 창설을 보는 위험을 감수하기보다는 모리타니의 동맹국이 되기 위해서였다. 알제리와 폴리사리오(Polisario)는 이에 대항하려고 하였으며, 이전의 스페인 영토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1970년 이래 국제 정치에서 하산 2세의 또 다른 주요 조치는 중동 평화를 위한 아랍-이스라엘 화해였다. 1981년 3월, 이스라엘 야당 지도자 시몬 페레스를 마라케시에서 영접함으로써 주권자는 이스라엘과 아랍 이웃 국가들 사이에 평화를 확립하기 위한 긴 길을 열었다. 일찍이 1982년에 그는 사우디 아라비아의 파드 국왕에게 이스라엘에 대한 아랍의 정책이 교착 상태에 빠져 있으며 유대 국가와의 대화가 시작되어야 한다고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1984년 8월, 미들 아틀라스(Middle Atlas)의 이프란(Ifrane)에 있는 자신의 궁전에서 최초의 이스라엘-이집트 정상회담을 주최한 사람도 바로 그였다. 하산 2세는 자신의 업적을 통해 영향력 있는 모로코 유태인 디아스포라의 동맹이 되었으며, 심지어 유태인 공동체의 구성원을 성직자나 고문으로 선택하기까지 했다. 이것이 그가 에사우이라(Essaouira)에서 태어난 모로코계 유대인 앙드레 아줄레(André Azoulay)를 경제 및 재정 문제 고문으로 임명했고 모하메드 6세의 통치 기간 동안 여전히 이 직책을 유지한 방법입니다.
외교적, 경제적 측면에서 하산 2세는 모로코와 유럽의 화해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실제로 유럽연합은 20년 이상 모로코의 주요 무역 파트너로 자리매김하며 수출의 6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1999년 7월 23일, 하산 2세가 사망했다. 그의 장남 시디 모하메드는 모하메드 6세라는 이름으로 왕으로 선포되었다. 그는 정치적으로 안정된 나라를 물려받았고, 그의 아버지는 왕국 제도의 현대화와 수많은 개혁을 착수했다.
그의 거창한 정치 업적 외에도 하산 2세는 예술을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궁전의 건설과 장식을 위해 모로코 장인을 요청함으로써 군주는 자신을 예술의 진정한 후원자로 제시했습니다. 이 후원의 봉헌은 카사블랑카의 웅장한 하산 2 세 모스크 건설과 함께 21 세기 전야에 이루어졌습니다. 따라서 군주는 수천 명의 장인의 재능에 경의를 표하고 조상의 기술을 인정받을 수 있었습니다.
모로코는 전통 건축의 재료, 기술 및 장식 레퍼토리의 다양성, 풍부함으로 인해 수세기에 걸쳐 극도의 복잡성, 기하학 및 정교함이 남아있는 건축 언어를 개발할 수 있었던 이슬람 세계에서 몇 안 되는 국가 중 하나입니다.
Mohamed VI (모하메드 6세 : 1999년 - 현재)
모하메드 6세(아랍어: محمد السادس, 로마자: Muḥammad as-sādis, 베르베르어: ⵎⵓⵃⵎⴷ ⵡⵉⵙⵙ ⵚⴹⵉⵚ, 로마자: Muḥmmd wiss ṣḍiṣ, 1963년 8월 21일 출생)는 모로코의 왕이다. 알라위 왕조의 일원이었던 그는 1999년 7월 23일 아버지 하산 2세가 사망하자 왕위에 올랐다.
모하메드 6세의 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그에게 종교적, 정치적 교육을 제공하는 데 열심이었다. 4살 때 그는 왕궁에 있는 꾸란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교육 일과는 오전 6시에 한 시간 동안 꾸란을 암송하는 것으로 시작되었으며 공식 수업이 이어졌습니다. 그는 궁전의 요새화 된 벽 안에 건설된 왕실학교인 Collège Royal에서 첫 번째 초등 및 중등 연구를 마쳤습니다. 모하메드 6세는 언어에 뛰어났다.
1981년 학사 학위를 취득한 후 1985년 라바트 모하메드 V 대학교에서 법학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의 연구 논문은 "국제 관계 문제에서 아랍-아프리카 연합과 모로코 왕국의 전략"을 다루었습니다. 그는 또한 임페리얼 칼리지와 라바트 대학교에 다녔습니다.
1985년 11 월 26 일 모로코 왕립 육군의 대령 소령으로 임명되었습니다.
1987년 모하메드 6세는 정치학 분야에서 처음으로 CES(Certificat d'Études Supérieures)를 취득했다.
1988년 7월에는 공법 분야에서 DEA(Diplôme d'Études Approfondies)를 취득했다.
1988년 11월, 그는 브뤼셀에서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위원장인 자크 들로르(Jacques Delors) 집무실에서 견습했습니다. "EEC-마그레브 관계"에 대한 논문으로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1994년 7월 12일, 그는 소장으로 진급했고, 같은 해 그는 문화 고등 평의회 의장과 모로코 왕립 육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1999년 7월 23일, 아버지가 사망한 후 모하메드 6세가 왕위에 올랐고 7월 30일 라바트에서 대관식을 치렀다.
즉위 직후 모하메드 6세 국왕은 전국 TV 연설을 통해 빈곤과 부패 척결을 약속하는 한편 일자리를 창출하고 모로코의 인권 상황을 개선하겠다고 약속했다. 그의 개혁주의적 수사학은 이슬람 보수주의자들의 반대를 받았고, 그의 개혁 중 일부는 근본주의자들을 분노하게 했다.
2004년 2월, 그는 여성에게 더 많은 권한을 부여하는 새로운 가족법, 즉 무다와나(Mudawana)를 제정했다.
모하메드 6세는 또한 하산 2세 치하의 인권 침해를 조사하는 임무를 맡은 평등과 화해 위원회(IER)를 창설했다.
모하메드 6세는 모로코의 외교 정책에서 아프리카 관계를 점점 더 우선시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모로코는 걸프 협력 회의(Gulf Cooperation Council)뿐만 아니라 중국과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다른 비전통적 강대국과의 파트너십을 승인하여 무역 연계와 외국인 투자를 다각화하고 서방, 특히 유럽 연합(EU)에 대한 모로코의 전통적인 의존도를 제한하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모로코는 또한 리비아 위기에서 중재자 역할을 제안했으며 카타르 외교 위기에서 중립을 유지했습니다.
부시 행정부는 2004년 모로코를 미국의 주요 비나토 동맹국으로 지정했다. 모하메드 6세는 앞서 2000년 6월 백악관을 방문했고, 빌 클린턴 대통령과의 국빈 만찬에 참석한 바 있다. 워싱턴과 라바트는 나중에 2006년에 미국과 아프리카 국가 간의 유일한 자유 무역 협정에 서명했는데, 이는 무역 적자 증가로 인해 모로코 내에서 약간의 비판에 직면했습니다.
모로코와 이스라엘은 2020년 12월 10일 미국이 참여한 이스라엘-모로코 관계 정상화 협정의 일환으로 외교 관계를 복원했으며, 동시에 서사하라에 대한 모로코의 주권을 인정했다.
2021년 11월 팔레스타인 인민과의 국제 연대의 날에 모하메드는 모로코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평화 협상의 재개를 계속 추진할 것이라고 발표했습니다. 그는 양측에 "평화 프로세스를 방해하는 행동을 자제할 것"을 촉구했다.
모하메드 6세의 화해 요청에도 불구하고, 이웃 알제리와의 관계는 그의 통치 기간 동안 계속 강화되었다. 2004년 7월 모하메드는 모로코가 알제리인에 대한 비자 제한을 해제할 것이라고 발표했으며 알제리 대통령 압델라지즈 부테플리카는 2005년에 이 조치에 보답했습니다. 그러나 이2020년대에 주로 이스라엘-모로코 정상화 협정과 게르게라트 국경 충돌의 결과로 알제리와 긴장이 점차 고조되었습니다. 2021년 8월, 알제리는 모로코가 알제리 북부의 카빌리 지역 반정부 운동을 지원했다고 비난했고, 이후 모로코와의 외교 관계를 단절했다.
AD 1661-
Alaouite 왕조 (아랍어 : سلالة العلويين الفيلاليين, Sulālat al- 'Alawiyyīn al-Fīlālīyn)는 현재 모로코 왕실이다.
오늘날에도 모하메드 6세 국왕(Mohammed VI)이 모로코를 통치하고 있는 알라위(Alawit) 왕조는 아라비아의 얀보(Yanbo)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왕조의 조상은 13세기 초 두 번째 메리니드(Merinids) 술탄 아부 야쿱 유세프(Abu Yacoub Youssef, 1286-1307)의 통치 시대 때 타필라렛(Tafilalet)에 도착한 예언자의 후손인 하산 알 다킬(Hassan al-Dakhil)이었습니다. 그는 셰리프(Sherifian, 아랍 정통혈통) 가문의 후손으로 모로코에서 존경을 누렸습니다. 그 후 타필라렛(Tafilalat)은 알라위족의 거점이 되었습니다. 모로코가 총체적 무정부 상태에 빠졌을 때 사디(Saadi)인들이 이를 극복하지 못하자 알라위파 족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물레이 셰리프(Moulay Chérif, 1631-1636)와 물레이 모하메드(1636-1664) 1631년 52세의 나이에 물레이 셰리프는 타필랄레 주민들로부터 드라(Draa) 지역의 자우이아 세력의 확장으로 위협받는 지역의 방어 사령관을 맡게 됩니다. 타필라레의 수장인 물레이 셰리프는 사드 왕조의 마지막 왕들에 맞서 반기를 든 최초의 셰리프(Sherifian)였습니다. 사령관으로 임명된 지 5년 후, 그는 물러났고 그의 아들 중 한 명인 물레이 모하메드(Moulay Mohammed)가 필랄리언(Filalians)들에 의해 후계자로 선택되었습니다. 그는 타필라렛(Tafilalat)에서 라이벌을 제거하면서까지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한 후 필랄리언의 거점을 물루야(Moulouya)와 드라(Draa) 계곡으로 확장하는 데 성공하고 술탄으로 선포되었습니다. 미래 알라파 권력의 토대를 마련한 것은 물레이 모하메드(Moulay Mohammed)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후 그의 동생 물레이 라쉬드(Moulay Rachid)가 그의 업적을 완료했습니다.
물레이 라쉬드(Moulay Rachid, 1664-1672) 통치시대
물레이 모하메드(Moulay Mohammed)의 동생인 물레이 라쉬드(Moulay Rachid)는 알라윗(Alawit) 왕조의 진정한 건국자였습니다. 1664년부터 1672년까지 10년도 채 되지 않아 물레이 라쉬드는 시질마사(Sijilmassa)에서 물루야(Moulouya) 계곡 아래까지 이어지는 캐러밴 루트 전체를 장악하는 것을 시작으로 모로코 전역을 장악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이 루트는 한편으로는 지중해와 사하라 사막을 연결하는 통로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모로코의 사하라 횡단 무역로에서 얻은 수익으로 물레이 라쉬드가 군사 작전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고 군대를 무장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전략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했습니다. 1668년, 그는 드라(Draa)의 강력한 자우이아 세력을 제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심장부인 드라(Draa) 마을을 점령한 후 폐허로 만들었습니다. 이듬해 마라케시는 정복되었고, 1670년에는 일리그 자우이아도 함락되었습니다. 이 덕분에 물레이 라쉬드는 오랜 기간의 무정부 상태를 종식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정치적으로 모로코는 점차 재건되었습니다. 문필가이자 현명한 정치가였던 그는 페즈에 이슬람 서부에서 가장 큰 메데르사인 알-체라틴(al-Cherratin) 메데르사(madrasa)를 설립했습니다. 1672년부터 그는 자신의 통치 기간 동안 평화를 누렸던 페즈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는 페스 지디드(Fez Jdid) 북쪽에 위치한 체라다(Cherada)의 카스바(Qasba, 요새)와 알-체라틴(재단사)의 메데르사, 세부강을 가로지르는 대형 다리를 건설했습니다. 물레이 라쉬드는 마흔두 살의 나이에 말에서 떨어지는 사고로 갑자기 사망했고, 더 이상 그가 야심적으로 추진 중 이였던 국기재건 사업은 멈추고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그의 동생인 물레이 이스마일(Moulay Ismail)이 왕권을 넘겨받았지만 모로코는 매우 내부적으로 불안전한 상태였습니다.
물레이 이스마일 (Moulay Ismail, 1672-1727) 통치시대
물레이 라쉬드의 이복형제이자 그의 두터운 신임을 받은 물레이 이스마일은 물레이 라쉬드가 남쪽에서 싸우는 동안 모로코 북부 지역 사령관을 맡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총독으로 있던 도시 메크네스(Meknes)에 술탄으로 선포되었습니다. 물레이 이스마일의 통치는 시작부터 매우 어려웠습니다. 모로코를 안정시키고 무정부 상태와 특정주의를 극복하고 반대 세력 종교단의 위협적인 힘을 약화시키는 데 거의 20년이 넘게 걸렸습니다. 그 후 그는 모로코의 정치적 통합을 회복하는 데 드디어 성공했습니다. 그는 모리타니(Mauritania)와 투아트(Touat) 지역에서도 자신의 권위를 확립했습니다. 오랜 통치 기간 동안 물레이 이스마일은 강력한 군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이러한 국내 문제 외에도 물레이 이스마일은 모로코의 기독교 세력에 대항하는 성전인 지하드도 관여했습니다. 1681년 메흐디야(Mehdia), 1684년 탕헤르(Tanger), 1689년 라라쉬(Larache), 1691년 아르질라(Asilah) 등 10년 동안 포르투갈 군의 점령지와 영국군의 요새를 무력으로 모두 탈환했습니다. 그러나 유일하게 예외로 마자간(Mazagan)은 1769년까지 포르투갈 영토로 남아있었습니다. 오스만 제국의 위협에 직면한 물레이 이스마일은 모로코의 동쪽 국경을 요새와 방어용 카스바(성)을 쌓아 방어하는 데 성공하고 타자(Taza) 도시를 중심으로 한 군사 체계를 완성했습니다.
이 위대한 왕의 업적 중 하나는 강력한 군대를 양성한 것입니다. 이 군대는 흑인 노예 군, 부족들 산하 사병, 외국인 용병 등으로 나뉘어집니다. 물레이 이스마일은 상비군을 창설하여 전국의 요새와 성에 파견했습니다. 그리고 여러 부족들은 사병들은 군 복무의 대가로 토지를 받는 일종의 봉건적 계약 관계였습니다. 외국인 용병들은 때때로 포병이나 공병과 같은 기술 병력의 일부를 구성하거나 전투에서 선봉 부대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외부 적으로 물레이 이스마일 통치하에 모로코는 유럽에 중요한 무역 파트너였으며 유럽은 모로코를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로 간주했습니다. 무역 및 포로 석방과 관련하여 모로코는 프랑스 및 영국과 대사관 상호설치 협정을 맺습니다. 주요 유럽 국가들은 영사를 모로코에 상주시켰습니다. 한편, 이번에 남쪽으로 방향을 틀은 물레이 이스마일은 모리타니와 투아트에서 자신의 권위와 영향력을 확립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모로코와 세네갈 강 계곡, 니제르 강 루프를 잇는 사하라 횡단 무역로에서는 이제 모로코 화폐와 무게 및 측정 단위를 기준으로 거래가 이루어졌습니다. 트라르자의 무어족 주민들은 모리타니와 마찬가지로 물레이 이스마일을 자신들의 영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물레이 이스마일이 사망한 후 후계자 쟁탈전으로 인해 모로코는 또다시 무정부 상태와 혼란이 일어났습니다. 거의 30년(1727-1757) 동안 국가 재정은 바닥이 났고 식량 위기, 심지어 기근의 발병으로 이어졌습니다. 물레이 이스마일의 아들 일곱 명이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모로코 전역에서 내전이 발발했습니다. 그 사이에 열두 번이나 왕이 바뀌었습니다. 물레이 압달라는 왕위에 즉위했다가 다섯 번이나 전복되었습니다. 페즈 주민들의 반란을 진압해야 했던 그는 페즈 남쪽에 요새화된 모스크인 다르 다비바그(Dar Dabibagh, 작은 무두장이의 집)를 짓고 성벽의 일부를 해체했습니다. 그는 또한 페즈에 퐁두크(fondouk, 분수)와 네자린(Nejjarin) 구역을 만들었습니다. 1732년에는 페스-지디드(Fez Jdid)에 물레이 압달라 모스크를 지었습니다. 이 황실 모스크는 대부분의 알라윗 가문의 왕족 묘지와 인접했습니다.
메크네스(Meknes) 도시에서 그는 화려했던 마디나트 알 리야드(Madinat al-Riyad) 지역을 파괴했고 밥 알 만수르(Bab al-Mansour) 성벽을 만들었습니다.
초기 알라윗(Alawits) 왕조의 업적
알라위 최초의 위대한 군주인 물레이 라쉬드는 정치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문명화 사업에 몰두했습니다. 문필가이자 현명한 정치가였던 그는 페즈에 이슬람 서부에서 가장 큰 메데르사인 알-체라틴 메데르사(테일러즈)를 설립했습니다. 1672년부터 그는 자신의 통치 기간 동안 평화를 누렸던 페즈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는 페스 지디드 북쪽에 카스바 데 체라다를 건설하고 세부강을 가로지르는 큰 다리를 건설했습니다. 알 체라틴(Al-Cherratin)의 메데르사(madrasa), 라바트의 우다야(Oudaya), 물레이 라쉬드의 작품 일부, 알 마라카 등 여러 왕실 거주지는 모두 알라위 왕조 예술의 특징을 잘 보여줍니다. 이전 시대의 업적을 계승하는 동시에 테마의 통일성에 대한 열망, 실행의 웅장함에 대한 취향, 고전을 깨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공식을 추가하여 새로운 과정을 강조하려는 관심 등 알라윗트 창작의 특징이 될 새로운 방향이 이미 드러난 것이었습니다. 삼나무, 페인트 칠한 목재, 젤리 및 장식용 목공예품의 사용은 과거보다 더 광범위했습니다. 알라윗 문명의 진정한 붐이 시작된 것은 물레이 이스마일의 통치 아래서였습니다. 그는 메크네스(Meknes)를 수도로 삼아 제국의 도시로 격상시켰습니다. 메크네스는 모스크, 궁전, 기념비적인 문, 별궁, 분수대 등이 건설되면서 전례 없는 도시 개발이 이루어졌습니다. 위대한 건축가이자 종교심이 깊었던 그는 카스바, 밥 베르다인, 지투나, 부 아자, 시디 사이드 모스크, 라크다르 모스크, 다양한 영묘를 세웠습니다. 물레이 이스마일 시대의 예술은 위풍당당하고 강력했습니다. 그는 또한 메크네스를 모로코에서 가장 요새화된 도시로 만들었는데, 길이 40킬로미터가 넘는 성벽에 기념비적인 성문을 만들었고 성 안에 수많은 별궁이 배치되어 있으며, 그 가운데에는 광활한 녹지 공간과 함께 별궁과 식량, 마구, 무기 저장고 등 다양한 별관 건물이 세워져 있습니다. 주변 지역에는 광활한 초원(Agdal)과 과수원이 단지를 둘러싸고 있어 마치 천국 같은 느낌을 줍니다. 풍부한 장식과 다양한 형태 및 재료 덕분에 이 도시는 "모로코의 베르사유"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변화의 시작을 알리는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시디 모하메드 벤 압달라 (Sidi Mohammed ben Abdallah, 1757~1790) 통치시대
1757년, 아버지 물레이 압달라(Moulay Abdallah)가 사망하자 마라케시 총독 시디 모하메드 벤 압달라(인 Sidi Mohammed ben Abdallah)가 왕위를 계승했습니다. 사디 왕조의 술탄 알 만수르(al Mansour)를 존경했던 이 술탄은 군대를 직접 지휘하고 부족들의 관리 질서를 재확립하고 체리피안의 권위를 회복하고 황폐해진 나라를 재건해야하는 무거운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의 최우선 과제 중 하나는 무정부 상태에 부분적으로 책임이 있는 아비드(abids, 흑인노예 근위대) 세력의 권력을 무너뜨리는 것이었습니다. 술탄은 여러 차례에 걸쳐 아비드를 학살했고, 15,000명만 여러 주둔지로 나누어 베르베르족이나 귀치족 신병들과 함께 그곳에서 살도록 강요했습니다. 모로코 해안선의 특정 지점에서 기독교인의 존재를 없애고 싶었던 시디 모하메드 벤 압달라는 유럽 국가들의 해상 보복을 우려하여 해안 도시를 요새화하고 포병을 상주시켰습니다. 시디 모하메드 벤 압달라가 1769년 포르투갈이 점령하고 있던 마자간(Mazagan)을 싸울 필요도 없이 정복했습니다. 그는 군사들이 마자간을 포위했고 포르투갈은 크게 쓸모없는 이곳에서 스스로 철수를 결정합니다. 그 후 시디 모하메드 벤 압달라(Sidi Mohammed ben Abdallah)는 모로코의 무역 파트너 국가들의 수를 점차 늘리기 시작했습니다. 통치 기간 동안 시디 모하메드 벤 압달라 국왕은 대서양 연안에 여러 항구를 건설하고 모스크, 학교, 함맘, 성벽 등을 건설하여 안파(Anfa, 카사블랑카) 지역에 활기를 불어넣었습니다. 카사블랑카 항구의 현대화와 인프라 구축은 1765년 에사우이라(Essaouira Mogador, 모가도르) 도시의 설립과 마찬가지로 술탄의 대외 개방 정책의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는 모로코의 대외 무역 대부분을 자신이 쉽게 통제할 수 있는 항구로 집중시키고자 했습니다. 모가도르만은 이상적인 장소로 보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현실화하기 위해 툴롱(Toulon) 출신의 프랑스인 건축가 프랑수아 코르누(François Cornut)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유럽의 주요 항구와 무역 노선을 신설하고 모로코의 국가 위상을 선전하는 것 이였습니다. 시디 모하메드 벤 압달라 국왕은 모로코에 현대적이고 경쟁력 있는 대규모 항구를 건설하고 싶었습니다. 이 와중에 유명한 건축가이자 도시 계획가인 프랑수아 코르누는 1766년 라라슈(Larache) 재난 당시 포로로 잡혀왔던 상태였습니다. 그는 400명의 기독교인 포로들의 도움으로 이 도시를 요새화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도시의 레이아웃은 유럽 모델을 기반으로 했습니다. 시디 모하메드 벤 압발라는 정치와 전략에 대한 천재적인 재능 외에도 알라윗 왕조의 위대한 건축가 중 한 명이었어요. 그는 마라케시에 큰 애정을 보였는데, 카스바 지역의 건설 및 재건 공사와 아그달 정원 및 다양한 성역을 복원하는 작업을 수행했습니다. 또한 알 아자르 또는 알 루아 모스크, 베르다인 및 베니마 모스크, 시디 모하메드 벤 아이사 및 시디 부 오스만의 영묘 등 메크네스에 수많은 종교 건축물을 건축했습니다. 라바트에서는 알 수나 모스크의 기초 공사가 시작되었고 왕궁이 지어졌습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페즈시는 진정한 르네상스를 맞이했습니다. 여러 모스크와 연설장이 지어졌습니다. 그는 부아나니야 모스크도 복원했습니다. 시디 모하메드 벤 압달라가 손대지 않은 주요 도시는 없는 거의 없고 흔적은 모로코 전역에 걸쳐서 남아있습니다. 177-1780년 사이에 가뭄(1776~1782년)과 전염병 대유행(1797~1800년)으로 인해 모로코는 인구학적 대재앙과 대대적인 인구 이동이 발생했습니다. 가장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이 25년 동안 모로코 인구의 절반이 사망했으며, 이로 인해 많은 마을이 지도에서 사라지고 전염병의 영향을 덜 받는 지역으로 이주하는 이들로 인해 사회적 전반에 걸쳐 큰 위기가 닥쳤습니다. 16세기 초 500만 명에 달하던 모로코의 인구는 300만 명 이하로 감소했습니다. 그러나 이 재앙은 자우이아 족의 부활로 이어졌습니다. 1790년 시디 모하메드 벤 압달라가 사망하면서 모로코는 재건되었지만, 분열의 씨앗이 남아 자우이아 족의 세력이 커졌습니다.
물레이 야지드의 (Moulay Yazid, 1790-1792) 통치시대
시디 모하메드(Sidi Mohammed)의 후계자로 지명된 물레이 야지드(Moulay Yazid)는 아버지에 대한 일련의 반란과 반란을 일으키며 모험적이고 때로는 스캔들을 일으키는 삶을 살았습니다. 물레이 야지드의 짧은 통치 기간은 모로코 남부에서 일어난 봉기, 마라케시에서 술탄으로 선포된 형제 중 한 명, 수스(Souss)와 타필라렛(Tafilalet)에서 일어난 또 다른 형제들의 반란으로 특징지어집니다. 물레이 야지드는 엄청난 폭력과 잔인함으로 반응했습니다. 그는 약탈당한 마라케시를 탈환하고 반대세력을 학살했습니다. 그러나 그후 물레이 야지드는 전투에서 전사했습니다. 모로코는 1797년까지 분열된 상태로 위태로운 시기를 맞게 됩니다.
물레이 슬리만의 통치(Moulay Slimane, 1792-1822)통치시대
시디 모하메드 벤 압달라 술탄의 아들인 물레이 슬리만은 긴 통치 기간(30년) 초반에 모로코 남부 일부 지역에서 술탄으로 인정받은 물레이 히삼과 타필라렛의 또다른 영토에서 군림한 압데라흐마네라는 두 형제와 싸워야 했습니다. 그들에게 그의 승리한 이후에도 세 가지 새로운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1810년경에 발생한 산악 지역의 및 베르베르족 내란 위기(리프, 중부 및 북부 아틀라스, (Rif, Middle and High Atlas)), 자우이아(zaouias) 세력의 부활로 인한 종교적 위기, 마지막으로 앞선 두 위기가 종합된 왕권 위기가 그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물레이 슬리만은 특정 지역의 가문들(특히 Derkaoua와 Tijanya)과 손을 잡고 연합합니다. 리프 반란군은 1813 년경에 진압되었습니다. 베르베르족의 아이트 아타(Ait Atta) 부족은 1816년 타필라레(Tafilalet) 지역의 일부를 장악했습니다. 아틀라스 중부의 봉기는 이 지역의 모든 산하자(Sanhaja)와 제넷(Zenet) 부족이 아부 바크르 암하우치라는 아이트 시디 알리 지도자를 중심으로 단결한 가장 큰 봉기였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술탄에 대항하여 단결하고 젬무르(Zemmour) 세력과 합류했습니다. 1818년, 술탄의 군대는 이 연합군에 의해 패배했고, 물레이 슬리만은 포로로 잡혔으며 그의 아들 물레이 브라힘은 살해당했습니다. 나흘 간 포로로 잡혀 있는 동안 술탄은 이슬람 선지자(모하메드)의 후손으로서 반란군에 의해 풀려나기 전까지 존경받는 대우를 받았습니다. 이제 베르베르 산맥의 지배자가 된 암하우치(Amhaouch)는 1820년 페즈에 입성하여 술탄과 전쟁을 벌이고 있던 우에잔 세력의 지도자들을 만나서 동맹에 합의했습니다. 국제적인 측면에서 물레이 슬리만(Moulay Slimane)은 대외 무역이 감소한 1805년까지 시디 모하메드 벤 압달라(Sidi Mohammed ben Abdallah) 정책을 따랐습니다. 19세기 초, 이러한 경제적 쇠퇴는 모로코 빈곤의 큰 원인이며 그후 고립과 철수 정책이 시작되었습니다. 물레이 슬리만은 전임자들과 마찬가지로 종교 건축물의 건설과 복원에 착수했습니다. 페즈에서는 위대한 알-알시프 모스크인 밥 귀사(Bab Guissa) 성문과 메데르사(madrasa)를 세웠고, 위풍당당한 저택인 다르 물레이 슬리먼(Dar Moulay Slimane)의 건축을 맡기도 했습니다. 또한 페즈의 다르 알 마흐젠(dar al Makhzen)에서 요새에 성벽을 쌓는 일을 수행했습니다. 19세기 초, 라바트에는 알 쿠바(al-Qubba mosque) 모스크와 물레이 슬리만 모스크가 세워졌습다. 물레이 슬리만의 통치 말기는 중앙 권력의 약화 현상이 특징입니다. 1822년 술탄은 내전에서 다시 패배했고 승리자인 자우이아 체라디야(zaouia cherradiya)은 그를 죽이지 않고 풀어주었습니다. 마라케시로 돌아온 물레이 슬리만은 이제 모든 명성을 잃었고 조카 중 한 명인 동생 물레이 히삼의 아들 물레이 압데라흐만 벤 히삼(Moulay Abderrahmne ben Hicham)을 후계자로 선택했습니다.
Abderrahmane 압데라힘 (1822-1859) 통치시대
압데라힘 왕 재위 시기에 모로코는 유럽 강국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모로코가 Emir Abd al-Qadir(알제리 독립 운동 지도자)을 지지하고 그의 망명을 받아주자 1844 년에 Isly의 전투에서 프랑스 군에 의해 공격받고 패배하여 Emir Abd al-Qadir지지를 포기했다.
Muhammad IV (1859-1873)와 Hassan I (1873-1894)의 통치 기간에 알라윗 왕조는 무엇보다도 유럽 국가와 미국과의 무역 관계를 장려했다. 베르베르 족과 사하라 베두인 부족에 대한 통제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프랑스 군대의 긴밀한 협조 하에 모로코 군대 및 행정부 근대화에 착수했다. 모로코 북부를 정령하고 있었던 스페인과의 전쟁(1859-1860) 패배 후 서유럽 여러 나라들이 모로코 문제에 직접적으로 관여하기 시작했다. 마드리드 조약(1880)에서 모로코의 독립성이 보장되었지만, 프랑스는 더 큰 영향력을 얻었다. 이처럼 커져가는 영향력에 대응하기 위한 독일의 모로코 영향력 시도(1905-1906년)로 인해서 모로코는 첫 번째 위기와 1911년의 두 번째 모로코 위기를 초래했습니다. 1906년 스페인 남부 알헤스라스(Algecira)에서 열린 협상에서 서유럽 강대국들(영국-프랑스-스페인-독일) 간에 가까스로 외교적 타협을 보았다.
결국 모로코 국왕은 1912년 12월 3일에 페스(Fes)조약에 서명을 통해 프랑스 보호령을 인정해야만 했다. 동시에 북부 모로코의 Rif 지역은 스페인 지배하에 들어갔다. 모로코는 그후부터 프랑스의 지배하에 있다가 1956년 3월 2일에 드디어 독립했다.
Sidi Mohammed ben Abderrahmane 또는 Mohamed 4세 (1859-1873) 통치시대
모하메드 4세는 그의 아버지가 살아 있는 동안 그의 직위와 총독으로서의 역할 때문에 그의 아버지에 의해 후계자로 지정되었습니다. 사실 모하메드 4세는 이미 오래전부터 사업에 착수해 있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그는 유럽 강대국들과 계속 대결하면서 그들의 경쟁을 이용했다. 그는 본질적으로 그의 통치 초기에 직면해야 했던 스페인과의 전쟁을 제외하고는 열강들의 경제적 사업에 대한 소극적인 저항을 제공했다.
이 사건은 Anjra 반란 동안 스페인 무기를 표시한 북부의 국경 표지가 파괴되면서 촉발되었다. 스페인이 1860년 2월 6일 테투안(Tetouan)을 점령하는 데 필요한 것은 이것이 전부였다. 세우타(Ceuta) 평화 조약(1860년 4월 26일)의 많은 조항 중 하나는 모로코가 2천만 Douros라는 참혹한 전쟁 배상금을 지불하도록 규정했다. 이 금액을 지불할 수 없었고 특히 이 새로운 굴욕이 불러일으킨 산발적인 반란에 당황한 모하메드 4세는 영국 은행으로부터 급하게 돈을 차용해야 했고 이로 인해 두 나라간 무역 관세서약에 매우 불리하게 작용되었다. 영국과 스페인은 모로코의 정치적, 경제적 위기를 통화 위기로 점차 악화시켰다. 그 이후로는 차관이 뒤따랐고, 이는 제국의 재정에 문제를 일으켰고, 유럽의 영향에 개방함으로써 제국의 독립에 반복적인 타격을 가했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 모로코는 군사적으로도 무력한 상태에서, 유럽열강국가들이 이 상황을 이용하고 그들의 요구와 이권을 집요하게 강요했다.
이러한 상황은 19세기 후반에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나라를 크게 불안정하게 했고, 모하메드 4세가 직면해야 했던 수많은 반란을 불러일으켰다.
한편, 그의 선대왕들과 마찬가지로 모하메드 4세는 그의 화려한 건축 작품으로 그의 통치를 표시했습니다. 또한 그의 통치 기간 동안 Jnan Redouan과 Menara의 파빌리온, 마라 케시의 Sidi Bel Abbas의 분수, 라바트의 왕궁이 세워졌습니다. 모하메드 4세는 또한 마라케시에 탄약 공장을, 페즈에 무기고를 건설했다.
Moulay al Hassan(물레이 알 하산) 또는 하산 1세의 (1873-1894) 통치시대
아버지 모하메드 4세의 생전에 남부에서 술탄의 칼리파로 일했던 물라이 알 하산이 그의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그는 모로코가 알고 있는 가장 위대한 군주 중 한 명이었으며, 그의 경건함과 냉철함으로 인해 큰 명성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그의 왕위 계승은 모로코 사회가 경험한 그의 통치 이전에 깊은 불안으로 촉발된 반란으로 표시되었습니다. 페즈에서는 무두장이들이 그에게 맹세하기를 거부했고, 메크네스(Meknes) 지역에서는 부족들이 봉기했다.
하산 1세는 곧 이 반란을 진압하고 중부 아틀라스를 평정했다. 그의 작품의 폭과 모든 분야에 걸친 혁신적인 아이디어는 이 알라위 술탄을 위대한 통치자로 만들었다. 북아프리카의 불리한 정치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기술, 용기 및 선견지명 덕분에 평화를 유지하고 독립을 수호할 수 있었다. 모로코를 현대화하고 자원을 더 잘 활용하기 위해 하산 1세는 학생들을 해외로 보내고 마흐젠을 조직하는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혁신을 이루었다. 수입의 필요성을 줄이기 위해 산업과 농업이 장려되었다. 항구를 개발하기 위한 주요 작업이 수행되었다.
철도와 교량도 내륙에 건설될 예정이었기 때문에 유럽의 산업가들과의 경쟁이 치열해졌다. 우편 서비스와 전신은 영국인과 프랑스인이 공유했습니다. 탕헤르 부근의 석탄, 수스 (Souss)의 납과 구리, 세우타 (Ceuta) 근처의 안티몬, 제벨 하디드 (Djebel Hadid)의 철 등 심토의 풍요로움이 착취되기 시작했다.
그의 최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개발 작업은 오해를 받았고 세기 말에 이르러 재정 문제가 발생하여 차입이 불가피하고 파멸적이었습니다. 하산 1세는 유럽이 이미 승리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비교적 평화로운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나라는 여전히 복종하였다.
유럽 열강의 제국주의가 성장하고 물레이 알 하산이 직면해야 했던 내부 반란에도 불구하고 건축 작업은 무시되지 않았습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세워진 많은 건물 중에는 마라케시시, Bab Chkirou (1873-1874)가 있습니다.
살레 (Salé)시, 유명한 Dar Sbihi와 Dar Aouad의 부유한 거주지; Meknes시, Sultan Dar Abdallah Jamai (현재 박물관) 장관의 거주지 및 caïd Mechouar Dar bel Allam의 거주지; 페즈 (Fez)시의 시디 아메드 벤 야 히아 모스크 (Sidi Ahmed ben Yahya mosque)는 1882-1883 년에 큰 모스크로 확대되어 변형되었으며, 1890 년에 지어진 다르 알 바이다 궁전 (Dar al Bayda palace)은 하산 1 세의 작품이며, 술탄 다르 바타 (Sultan Dar Batha)의 여름 궁전은 1897 년 물레이 압드 알 아지즈 (Moulay Abd al-Aziz)와 무기 공장 또는 마키나 (Makina) (무기고)에서 완성되었습니다. 1885 년 Fez Jdid에 지어졌습니다.
Moulay Abd al-Aziz 물레이 압드 알 아지즈 (1894-1908) 통치시대
하산 1세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왕위 계승 문제가 다시 불거졌다. 그러나 바 아흐메드(Ba Ahmed)로 알려진 강력하고 웅장한 고관 벤 무사(Ben Moussa)의 압력으로 14세의 아브드 알 아지즈는 1894년 울레마와 상의하지 않고 술탄으로 선포되었다. 이 "부과된" 즉위에 대한 극악무도한 반대, 특히 페즈의 많은 저명인사들은 법원을 마라케시로 옮기도록 강요했습니다. 많은 반대자들은 아브드 알 아지즈의 형인 물레이 모하메드가 왕좌에 오르는 것을 보고 싶어했을 것이다.
6년 동안 권력의 실체는 바아흐메드(Ba Ahmed)가 권력을 행사했고, 물레이 하산(Moulay Hassan)의 미망인인 체르케스인 랄라 르키야(Lalla Rqiya)의 지원을 받았다. 그는 내륙에 질서를 가져왔고 강대국들, 특히 프랑스와 영국의 경쟁을 이용하여 모로코에 대한 그들의 지배를 지연시켰다. 그러나이 고관은 모로코가 다음 해에 겪어야 하는 심각한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그는 궁전에 갇힌 젊은 술탄의 교육을 소홀히 했으며, 왕자와 미래의 군주에게 필요한 지식과 훈련을 받지 못한 채 편안하게 자랐습니다. 그의 소홀한 교육과 마흐젠이 경쟁 씨족으로 나뉘었기 때문에 그는 유럽 기술의 참신함에 매료된 폭력적이지만 약하지 않은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테니스를 쳤고, 자전거, 자동차, 피아노, 축음기, 카메라로 둘러싸여 있었다.
1900년 바 아흐메드가 사망하자 20세의 물레이 압드 알 아지즈가 왕위에 올랐다. 그의 즉위와 함께 모로코의 독립 상실로 이어질 심각한 혼란의 시기가 시작되었다는 것이 국내적으로나 외교적으로 발표되었습니다. 물레이 압드 알 아지즈의 유럽의 기술 혁신에 대한 뚜렷한 취향과 그에 따른 엄청난 비용은 이맘으로서의 의무를 수행할 수 없는 무능력에 더해져 그와 그의 백성 사이의 격차를 벌리고 그의 위신을 크게 손상시켰다. 사람들은 이러한 혁신이 이슬람의 교훈에 어긋나고 종교에 위험한 혁신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고립과 전통으로의 회귀만이 이 나라에 활력과 힘을 회복시킬 수 있다고 확신했다.
젊은 통치자가 농업 재산에 대한 세금인 테르티브(tertib)와 같은 진정으로 혁명적인 개혁을 단행했을 때 불만은 깊어졌다. 아브드 알 아지즈(Abd al-Aziz)는 전통적인 코란세를 이 새로운 세금으로 대체하기로 결정했는데, 이는 부유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겸손한 사람들도 납부해야 했기 때문에 평등주의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결정은 특권층과 서민 모두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술탄은 자신의 운명을 위협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적대감, 특히 고위 관료들의 적대감과 유럽 열강의 압력 때문에 개혁을 수행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20세기의 시작은 모로코의 재정 위기가 가속화된 혼란의 시기와 함께 시작되었다. 1902년에 모로코 재무부에 7,500,000 프랑 상당의 돈을 빌려준 Banque de Paris et des Pays-Bas의 이익을 위해 차입 기간이 빠르게 열렸습니다. 1년 후, 같은 액수의 돈을 두 번이나 빌렸는데, 처음에는 영국 은행에서, 그 다음에는 스페인 은행에서 빌렸다. 이 차관은 술탄의 빚을 갚고, 적군에 대한 군사 작전을 수행하고, 주요 공사에 장비와 서비스를 제공한 외국 회사에 사용되었습니다. 그때부터 각 대출은 주로 이전 대출을 상환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모로코 정복을 촉진하기 위한 식민지 음모와 밀접하게 연결된 보호령 전야에 반란은 반대 의견으로 변질되었고 불안은 악화되고 널리 퍼졌습니다. 실제로, 중앙 권력의 약화를 이용하여, 프랑스는 1890년 이래 모로코 사하라 사막에서 이미 착수된 행동을 강화했다. 1903년, 지중해에서 베니-압바스에 이르는 국경의 "평정을 보장"하기 위해 리요테가 알제리의 장군으로 부름을 받고 임명되었을 때, 서쪽으로 모로코 영토로 향하는 프랑스의 미묘한 진격이 더욱 두드러졌다. 1908년, 프랑스는 이제 알제리 국경과 물루야 사이의 전 지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더욱이 20세기 초의 제국주의 경쟁에서 모로코에 대한 우위를 보장하기 위해 프랑스는 1904년 영국과 일련의 협정을 체결한 후 스페인과 약간의 양보를 대가로 서명했다. 이러한 협약에서 체계적으로 배제되고 모로코에 이해관계가 있는 독일은 술탄에게 프랑스의 압력에 굴복하지 말고, 모든 제안을 거부하고, 무엇보다도 모로코에 관심이 있는 모든 강대국의 회의 소집을 요구함으로써 불만을 표시했다. 1905년 3월 31일 빌헬름 2세가 탕헤르(Tanger)에 도착하여 물레이 압드 알 아지즈의 주권과 독립을 인정하고 모로코의 권력 간의 평등을 위협할 수 있는 모든 것에 반대한다는 것을 확인한 수많은 선언은 유럽의 긴장 과정을 촉발했습니다.
술탄의 요청과 독일의 압력으로 이러한 긴장은 1906년 1월 7일부터 4월 6일까지 스페인의 알헤시라스(Algeciras)에서 개최된 13개국이 모이는 국제 회의를 촉발했습니다. 독일은 고립되어 있었고 영국은 프랑스를 지원하여 모든 혜택을 누렸다. 모로코의 독립과 완전성이 인정되었고 프랑스는 라바트(Rabat), 마자간(Mazagan), 사피(Safi), 모가도르(Mogador)를 장악했다. 스페인은 테투안(Tetouan)과 라라체(Larache)를 얻었고 카사블랑카(Casablanca)와 탕헤르(Tanger)를 프랑스와 공유했다. 모로코를 일종의 "국제 보호령"하에 두면서 알헤시라스 조약은 모로코의 독립을 실질적으로 끝냈습니다.
모로코에서 이 조약은 술탄과 마흐젠을 타성과 배신이라고 비난한 전체 국민의 불만을 불러일으켰다. 도처에서 폭동이 일어나 술탄의 관리들과 유럽인들을 위협했다. 프랑스는 이 사태로 인해 프랑스와 모로코 사이에 일어난 사건을 이용하여 1907년 카사블랑카와 1908년 차우이아 전역을 시작으로 모로코 동부 우즈다(Oujada)를 시작으로 모로코에 대한 군사 점령에 착수했다.
Moulay Abd al-Aziz의 통치는 그의 전임자들과 마찬가지로 건축 작품의 건설과 완성을 보았습니다. 물레이 알 하산(Moulay al Hassan)의 여름 궁전인 페즈(Fez)에서는 다르 바타(Dar Bata)가 완공되었고, 다르 메네비(Dar Menebhi), 다르 글라우이(Dar Glaoui), 다르 알 모크리(Dar al-Mokri)가 세워졌습니다. 마라케시에서는 바이아 (Bahia)와 다르 시 사이드 (Dar Si Saïd) 궁전이 지어졌고 메크 네스 (Meknes)에서는 다르 베 나니 (Dar Benani)가 지어졌습니다.
Moulay Hafid 물레이 하피드 (1908-1912) 통치시대
모범적인 경건함으로 명성을 얻은 아브드 알 아지즈의 형인 물레이 하피드는 카사블랑카 사건 이후 1907년 8월 16일 마라케시에서 술탄으로 선포되었습니다. 페즈에서 그는 성전을 수행하겠다는 약속으로 갈채를 받았고 페즈의 울레마는 그에게 알헤시라스 협정을 파기하고 차우이아와 동부 모로코에서 프랑스를 몰아낼 것을 요청했습니다. 아브드 엘 아지즈는 그 후 폐위되었다. 물레이 하피드는 권력을 잡았지만 권력을 행사할 수 없었고, 무엇보다도 약속을 지킬 수 없었다. 그는 군대 분야에서 지배권을 강요하는 프랑스와 무익한 협상을 시작했고, 카사블랑카와 차우이아의 보복 작전에 대한 막대한 배상금을 요구했다. 물레이 하피드는 지하드를 포기해야 했고, 다시 한번 모로코 국민과 울라마를 분노케 했다.
스페인은 이 상황을 이용하여 북쪽에서 스페인과 모로코 사이에 일어난 사건을 계기로 리프 제도의 일부를 침공했다. 프랑스는 이미 많은 돈을 '투자'한 나라에서 이러한 불안정과 유혈 반란의 분위기를 용납할 수 없었고, 1911년 5월 4일 물레 하피드는 샤리피아의 권위를 유지하면서 평화를 회복하고 불안과 불안의 원인을 제거하기 위해 프랑스의 도움을 요청하는 4월 17일자 프랑스 정부에 보내는 서한에 서명하도록 강요했다. 수도 페즈의 성문은 이제 열렸고 Moinier 기둥은 1911 년 3 월 21 일에 도시에 들어갔습니다. 메크네스는 6월 8일에, 라바트는 7월 9일에 투자되었다.
프랑스의 점령에 스페인은 라라체(Larache)와 엘 크사르 엘 케비르(Ksar El-Kebir)를 점령함으로써 대응했다. 프랑스의 모로코 침공에 대한 반대를 멈추지 않았던 독일은 1911년 7월 1일까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고, 수스에 대한 경제적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순양함 팬더를 아가디르(Agadir)로 보냈다. 적어도 그것은 공식적인 구실이었다. 사실, 그것은 프랑스가 처벌받지 않고 모로코를 차지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문제였습니다. 독일을 "달래고" 곧 공식적으로 모로코에 대한 프랑스의 보호령이 될 것을 인정받기 위해, 프랑스는 보상을 제공하기로 결정했다. 1911년 11월 4일, 베를린 조약에 의해 독일은 프랑스의 보호령을 인정했지만 콩고의 일부를 받았다.
더 이상 유럽 식민지 열강의 개입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고, 물레이 하피드를 외교적으로 고립시킬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프랑스는 이제 모로코에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게 되었다. 1912 년 3 월 24 일, 탕헤르 (Tangier)의 프랑스 장관 인 레노 (Regnault)는 술탄이 보호령 조약 또는 페즈 조약에 서명하도록하는 임무를 가지고 페즈에 도착했습니다. 5,000명의 프랑스 병사들이 궁전 벽 아래에 진을 치고, 왕국의 서쪽과 동쪽의 넓은 지역을 점령하고,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던 무정부 상태의 분위기로 인해 물레 하피드는 1912년 3월 30일 보호령 조약에 서명하는 데 동의했습니다. 이 서명은 특히 페즈 시에서 유혈 전투의 물결을 일으켰습니다. 평화 협상이 예상만큼 쉽지 않자, 파리의 각 부처는 의지가 강한 위베르 뤼테이를 파견하여 모든 군사 및 행정 문제를 해결하기로 결정했다. 모로코의 첫 번째 주재 장군으로서 그는 1912년 9월 마라케시와 1914년 타자를 점령하여 5월에 페즈에서 평온을 회복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리요테(Lyautey) 총독는 수도를 라바트로 이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프랑스의 주장에 따라 술탄은 "건강상의 이유로" 퇴위하고 Lyautey 총독이 지목한 그의 동생 Moulay Youssef가 왕위에 즉위하게되었다. 물레이 하피드는 퇴위하는 대가로 연간 375,000프랑의 연금과 40,000파운드의 수표를 받았다.
프랑스 보호령 (1912-1956)의 Moulay Youssef 물레이 유세프 (1912-1927) 통치시대
마흐젠은 물레이 유세프를 술탄으로 인정해야 했고, 리요테(Lyautey) 통독은 그의 의지대로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맘이자 칼리프였던 술탄은 자신의 명성의 모든 속성을 유지했으며 그의 영적 힘은 그대로 유지되어 Lyautey 측에서 진지한 존경의 대상이었습니다. 입법권, 행정권, 사법권에 관해서는, 그는 관저가 그에게 제시한 다히르(법안)에 서명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마찬가지로, 공무원을 임명할 때, 그는 위원회가 그에게 제출한 명단을 제외하고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마크젠은 계획대로 개혁되었다. 그것은 단지 겉치레의 역할만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레지던트의 행정 하에 모로코를 현대화로 이끌어야 하는 시스템의 주변부에 유지된 낡은 질서의 생존이다.
후자는 모로코에서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를 명확하게 구분하면서 "진정한 국가, 예외적으로 풍부한 과거, 독창적 인 구조 및 문명을 가진 민족"에 직면해 있음을 빠르게 이해하고 선언했습니다. 보호령이 필연적으로 모로코의 독립으로 이어질 과도기적 국가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던 리요테(Lyautey) 총독은 이 후 13년 동안 이 방향으로 행동해야 했으며, 무엇보다도 군벌이었을 뿐만 아니라 외교적이고 모로코의 정체성을 존중하는 지적인 행정가였다. 또한 모로코 건축과 예술품에 대한 그의 존경심은 모범적이었습니다. 교양 있는 탐미주의자로서 그는 도시가 개발되고 주요 프로젝트 중에 도시가 존중되고 문화 유산이 보호되도록 했습니다.
프랑스 보호령의 설립과 Lyautey의 존재는 불안이 지속되는 것을 막지 못했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모로코의 저항은 공고해지고 있었다. 실제로 무장 저항은 매우 중요하고 매우 길었다. 부족들은 힘의 불균형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군대의 도착과 기독교 세력에 의한 식민지화를 반응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1934년까지 일부 지역에서 저항하다가 마침내 모로코가 평화로워졌다고 생각했다. 그 후 정치 의식은 도심에서 발전했고, 그 투쟁은 그때부터 본질적으로 정치적이었다.
1927년, 술탄 물레이 유세프가 사망했다. 그의 세 아들 중 막내인 시디 모하메드 벤 유세프는 18세의 나이로 모하메드 5세의 이름으로 술탄으로 선포되었다.
Mohamed V 모하메드 5세의 통치와 민족 해방 (1927-1961)
술탄 물레이 유세프가 사망하자 그의 세 아들 중 막내가 1927년 11월 18일 금요일에 모로코의 술탄으로 선포되었습니다. 이 무렵 보호령 조약은 이미 15년이 지났고, 군사적 저항은 거의 모두 무너졌으며, 리프 전쟁은 끝났고, 세계 식민주의는 "황금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모하메드 5세는 정치적 비상사태가 1927년의 독립, 유토피아가 아니라 모로코의 통합과 정체성을 수호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재빨리 이해했다. 그의 통치 첫 20년 동안 그의 최우선 과제는 모로코 보호령이 식민지로 전락하는 것을 막는 것이었다. 실제로 모하메드 5세는 1912년 조약이 그에게 부여한 것의 어떤 부분도 양도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1944년부터 모하메드 5세의 모든 행동은 모로코의 독립을 목표로 했다. 전적인 결단력과 대단한 정치적 감각으로 두 가지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군주는 모로코의 국가 통일이나 주권에 관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고 비타협적이었습니다.
이러한 비타협적인 태도의 많은 예들 중 하나는 프랑스군이 패배한 후, 비시 정부가 프랑스와 알제리에서 시행된 반 유태주의 법률을 모로코로 확대하기를 원했을 때였다. 술탄은 모로코에 살고 있는 유태인들은 모로코의 신민이며, 그들에게 특별법을 적용하려는 시도는 모로코의 국가 통합과 주권 분야에서 용납할 수 없는 선례를 남길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이에 근본적으로 반대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여파로 프랑스의 위신은 손상되었고, 대서양 헌장은 모든 국민이 자신이 원하는 정부 형태를 선택할 권리를 선언했습니다. 술탄 모하메드 5세가 프랑스로 가서 드골 장군이 모로코 해방의 한 형태에 대해 생각해보겠다고 약속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다.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는데, 1946년 드골이 사임하고 역대 정부들이 이 새로운 상황을 고려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로코에서 민족주의자들은 더 이상 개혁을 요구하지 않고 독립을 요구하고 있다. 1943년에 창당된 이스티크랄(독립당)은 현재 모하메드 5세의 측근들과 권력은 없지만 포럼인 정부 평의회에서 강력한 존재감을 드러내며 정치 생활을 지배하고 있다.
모하메드 5세는 1951년 프랑스를 다시 방문하여 1912년 보호령 조약을 종식시킬 것을 정부에 요청했다. 프랑스 정부가 제안한 일련의 개혁은 모로코에 대한 공동 주권, 즉 독립에 반대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모로코로 돌아오자마자 항의의 표시로 모하메드 5세는 "인감 파업(서명 거부)"을 결정했는데, 이는 프랑스 거주자인 주앙 장군이 공포하기 위해 제출한 다히르(Dahir, 왕령)가 더 이상 비준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상황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후인 장군은 모하메드 5세에게 사임할 것을 요청했다. 1950 년 12 월 23 일 토요일, 프랑스의 충실한 동맹국 인 마라 케시 타미 알 글라우이 (Marrakech Si Thami al-Glaoui)의 파샤 (Pasha)는 모하메드 V (Mouloud)를 계기로 모하메드 V (Mohammed V)에게 자신의 소원을 제시하기 위해 궁전에 갔고 그는 군주에게 Istiqlal의 구성원에 의해 영향을받지 말라고 요청했습니다. 모하메드 5세는 무례하게 그를 해임하고 대관을 통해 추후 통지가 있을 때까지 궁전에 대한 접근을 금지한다고 통보했습니다. 1951년 2월, 술탄이 "봉인 파업"을 중단하도록 강요하기 위해, 그리고 거주지의 동의와 물질적 지원을 받아, 알 글라우이는 수천 명의 부족 기병을 페즈와 라바트로 보냈다. 모하메드 5세는 2월 23일 내전을 촉발할 위험이 있는 이 쿠데타에 직면하여 항복했다.
절망에 빠진 모하메드 5세는 1952년 11월 "왕좌로부터의 연설"에서 모로코의 즉각적인 해방을 요구했다.
이 절망적인 행동은 프랑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8월 14일과 15일에 군주는 하산 왕세자와 함께 체포되어 코르시카와 마다가스카르에서 2년 이상 망명하기 위해 프랑스 군용기에 탑승했다. 8월 15일, 알라위 가문의 셰리프인 모하메드 벤 아라파(Mohammed ben Arafa)는 글라우이(Glaoui)가 저택에 제안한 "왕위 후보자"로 마라케시에서 "신실한 왕자"로 선포되었다. 모로코 국민들은 분노에 휩싸였고 테러 행위는 증가했다. 상황이 악화되고 심각한 문제, 특히 1954년 5월 디엔비엔푸의 함락이나 같은 해 가을 알제리 전쟁의 발발을 보고 프랑스는 행동에 나서기로 결정했다.
1955년 8월 22일, 한편으로는 술탄과 다른 한편으로는 민족주의자들과 비공식적인 접촉이 이루어진 후, 엑상레뱅에서 회의가 시작되었다. 프랑스-모로코 관계의 미래에 대한 협상의 기초를 마련하기 위해 왕위 위원회와 모로코 정부를 창설하기로 결정했습니다. 9월 8일, 모하메드 5세가 승인한 모하메드 빈 아라파는 10월 1일에 퇴위했고, 9월 26일에는 이스티크랄(독립정)이 합법적인 술탄의 귀환을 요구했다. 1955년 11월 1일 프랑스에서 에드가 포레(Edgar Faure) 프랑스 의회 의장과 앙투안 피네(Antoine Pinay) 외무부 장관과 함께 시작된 협상 끝에 모하메드 5세는 프랑스가 보호령 정권을 종식시키고 모로코의 완전한 독립을 회복하는 "라 첼 생 클라우드 선언"을 얻어냈다. 11월 10일, 모하메드 5세는 환호 속에 모로코로 돌아왔다.
1956년 3월 2일 금요일, 프랑스는 모로코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문서에 서명했다. 4월 7일, 스페인이 왕국 북부에 대해 행사한 주권을 포기한다는 선언이 서명되었다. 10월 29일, 탕헤르 지역은 모로코에 재통합되었다.
모하메드 5세의 통치 기간 동안 모로코는 독립을 되찾았고 군주는 술탄 대신 왕의 칭호를 받았습니다. "해방되고 사랑받는 술탄"인 모하메드 5세는 1961년 2월 26일 수술 중 갑작스럽게 사망했습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마자 모로코는 가장 큰 고통에 빠졌다.
19세기와 20세기 알라윗 왕조 시대의 작품
모든 알라위 술탄은 건축 작품으로 그들의 시대에 흔적을 남겼으며, 그 세부 사항은 각 통치에 대해 위에서 되짚어 보았습니다. 그들의 정치적 노력은 결코 건축 건설에서 그들을 산만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알라위 예술은 이미 알라위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공식의 반복에 의존하고 있다. Moulay Slimane (1792-1822), Moulay Abderrahmane (1822-1859) 또는 Moulay al Hassan (1873-1894)과 같은 군주들은 모두 이전 시대의 업적을 영속시키면서 건축 및 장식 세부 사항으로 기존 레퍼토리를 풍부하게 하는 데 애착을 드러내는 단일 작품을 남겼습니다.
이 작품들은 makhzen의 유명 인사와 주요 도시의 부유한 상인들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 영향은 토목 건축, 특히 새로운 기여를 더 잘 받아들이고 창조의 르네상스를 허용한 고위 인사의 부유한 거주지에서 매우 분명합니다. 참신함은 주로 다양한 스타일을 낳는 벽돌과 장식에서 나타납니다.
왕조, 종교 및 시민 건축 (대형 모스크 및 궁전)은 스타일의 진정한 통일성을 보여 주었지만, 작은 웅변가의 건축과 부유한 고위 인사의 집에서는 3 개의 지역 학교를 구별할 수 있습니다. Fez-Meknes의 것은 Merinid 유산에 대한 충실도를 보여줍니다. 라바트 살레 (Rabat-Salé)의 것은 알 모하드 (Almohad) 전통과 건축 및 석조 작품 (조각, 조각)을 스페인 르네상스 (Moriscos에 의해 17 세기에 도입됨)의 특정 주제와 반원형 아치의 풍부한 몰딩과 결합합니다. 여전히 심오한 웅장함을 목격하는 마라케시 학교는 다색성의 자원이 결합된 벽돌과 어도비 건물에 충실합니다.
도시의 예술적 창조 (도자기, 자수, 태피스트리, 보석류, 청동 예술 등)는 안달루시아 인과 모리스코의 공헌으로 풍요로워진 중세로부터 물려받은 형태에 충실하면서도 정적으로 남아 있지 않고 새로운 조합을 통해 세부 사항을 풍부하게 했습니다.
농촌 환경의 예술은 도시 생산과는 매우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매우 풍부하고 다양합니다. 밝은 색상의 카펫은 거의 독점적으로 기하학적 패턴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때로는 매우 상징적입니다. 도자기는 형태의 우아함이 뛰어납니다. 무기와 장신구의 생산은 기술의 완벽한 숙달과 매우 다양함을 보여줍니다.
20세기 모로코 건축 예술은 긴 여정의 결과입니다. 이제부터 전통 건축의 장인들은 모로코에 이미 뿌리를 내린 공식인 이전 시대의 업적을 영속시킵니다. 그러나 그들은 새로운 건축 및 장식 세부 사항으로 기존 레퍼토리를 풍부하게 하는 데 특별한주의를 기울였습니다.
모로코의 건축가와 예술가는 일반적으로 새로운 기여를 수용하기 때문에 전통적인 형태에 대한 애착이 뿌리 깊게 남아 있더라도 창작의 르네상스를 허용합니다. 건축에서 참신함은 주로 석조물과 장식에서 나타나며 다양한 스타일을 낳습니다. 따라서 보호령 기간 동안 모로코 건축은 유럽의 예술 운동, 특히 순수한 기하학적 선을 가진 아르 데코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 영향은 장식적인 참신함으로 이미 수천 년 된 공식을 가진 건축물에 "접목"되었기 때문에 피상적이었습니다. 카사블랑카와 라바트의 많은 건물에는 이러한 혁신이 있습니다. 표준화에 굴복하기는 커녕 모로코의 전통 건축 예술은 그 정체성을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1912 년 보호령이 출현한 이래 모로코에서 도시 계획 개념과 Lyautey의 몇 가지 입법 조치를 구현한 것은 모로코 메디나와 역사적인 중심지가 이슬람 세계에서 가장 잘 보존되어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조치로 모로코 유산의 상당 부분을 보호할 수 있었습니다.
이른바 전통예술은 20세기 초에 격변을 겪었다. 1912년 보호령이 수립되었을 때, 새로운 유럽 물건의 도착, 플라스틱 및 특정 화학 제품의 도입, 중국 도자기의 수입은 모로코인들의 습관을 뒤엎고 장인, 특히 도예가와 도예가의 취향을 타락시켰습니다. 따라서 20세기 초에 도자기 산업은 동력이 고갈되기 시작했으며, 품질, 기술 및 빈곤한 장식 레퍼토리가 더 이상 이 전통 예술의 위대함을 반영하지 않는 물건을 만들었습니다. 모로코, 모로코의 문명과 예술에 대한 Lyautey의 사랑 덕분에 많은 조치가 취해졌습니다.
토착예술서비스(Indigenous Arts Service)는 도자기와 모든 모로코 전통 예술에 대한 위험을 빠르게 인식하여 아름다운 오래된 작품이나 전체 컬렉션을 수집하고 여러 박물관을 설립하고 수많은 전시회를 조직했습니다. 그들의 목표는 장인의 모델이 될 수 있는 예술적, 문화적 유산을 보존하고 일반적으로 모로코의 조상 전통의 복원을 자극하고 자극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이니셔티브 덕분에 예술, 특히 도자기의 진정한 르네상스가 일어났고 Al-Amali(1890년 알제에서 태어남)와 Al-Sarghini와 같은 예술가들은 새로운 모양과 패턴을 재창조하거나 모로코인과 외국 대중의 취향에 새로운 기술을 도입했습니다.
Hassan II 하산 2세(1961-1999) 통치시대
1961년 3월 3일, 하산 2세가 즉위하여 정치적으로 안정된 나라를 물려받았다. 아버지의 주도권을 영속화 하면서, 그는 술탄의 칭호를 왕의 칭호로 확실히 포기했으며, 이는 당시의 언급에 더 부합했습니다. 진정한 정치의 거장인 하산 2세는 어린 시절부터 그를 권력과 연관 지었던 아버지 모하메드 5세에 의해 훈련되고 준비되었다. 1999 년 7 월 23 일 사망으로 끝난 긴 통치 기간 동안 하산 2 세 왕은 오래되고 엄숙한 "Cherifian(체리피아) 제국"을 현대의 "모로코 왕국"으로 바꾸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통치 초기부터 젊은 군주는 왕국의 제도를 현대화하는 일에 착수했습니다. 그의 정책은 모로코의 전통과 뿌리를 보존하면서 현대 세계에 적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아들 모하메드 6세에게 물려준 나라는 그가 물려받은 나라와는 완전히 달랐다. 처음에는 더 큰 나라였는데, 그의 통치 기간 동안 1969 년 시디 이프니 (Sidi Ifni), 1975 년 사키아 알 함라 (Saquia al Hamra), 1979 년 우에드 알 다합 (Oued al Dahab)과 같은 세 개의 이전 스페인 영토로 확대되었으며, 후자의 두 그룹은 서부 사하라를 구성했습니다. 후자 덕분에 모로코는 현재 2,500km 이상의 대서양 해안선을 소유하는 해양 강국이 되었습니다. 둘째, 정치적, 경제적 무게중심이 서쪽으로 이동한 나라, 모로코는 철수 단계에서 벗어났다. 이 개방은 모로코의 심장부를 페즈 또는 마라케시에서 라바트와 카사블랑카로 확실히 이전하는 것을 동반했습니다. 마침내 정치적 교체가 현실이 된 민주주의 국가가 되었습니다. 실제로 1992년의 헌법 개정은 국무총리의 제안에 따라 주권자가 장관을 임명할 수 있도록 규정했기 때문에 실질적인 권력 변동을 가져왔다.
1996년에 두 번째 개혁을 통해 이 나라는 두 개의 의회를 갖게 되었고, 그 중 하나는 보통선거로 선출되었습니다. 따라서 모로코는 현행 헌법 제1조에 명시된 대로 "모로코는 입헌, 민주주의 및 사회 군주국이다"라고 명시된 대로 법의 지배를 받는 진정한 국가가 되었습니다. 1998년 3월, 국왕 하산 2세는 자신의 오랜 사회주의 정적이었던 압데라흐마네 유수피를 총리로 임명하기까지 했다.
하산 2 세의 통치는 또한 기후 위험의 결과를 제한하는 것이 경제적 목표였던 거대한 댐 건설 프로그램으로 특징 지어졌습니다. 후자는 국가 경제의 가장 중요한 부문인 농업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모로코에서 가뭄은 주기적입니다. 따라서 왕은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매년 새로운 저수지의 개통식을 볼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 정책은 완료되었으며 이것은 강조해야 할 큰 성공 중 하나입니다. 국제정치학적으로도 하산 2세의 업적은 매우 중요했다. "모로코는 아프리카의 토양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유럽의 바람에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덕분에 숨을 쉬는 나무를 닮았다 "는 말이 그가 즐겨 되풀이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모로코의 뿌리는 대부분 사하라 사막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 스페인령 사하라 사막의 회복이 하산 2세에게 타협할 수 없는 명분이었던 이유이다. 1975년, 스페인의 망설임과 알제리의 책략에 대한 우려에 직면한 하산 2세 국왕은 식민지 분할 기간 동안 잃어버린 국토의 이 부분을 평화롭게 되찾기 위해 수십만 명의 남성과 여성을 보내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1975년 11월 6일 목요일, 행진이 시작되었다. 수십만 명의 행진자들이 이끄는 "녹색 행진"이었고, 코란 손에 모로코 국기가 많았습니다. 비무장 민간인 군중에게 발포 명령을 내릴 수 없는 기정사실에 직면한 스페인은 11월 14일 모로코, 모리타니, 스페인 간의 삼자 협정에 서명했는데, 이 협정은 모로코와 모리타니 사이의 이전 스페인 식민지를 분할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모로코에서는 북부, 즉 Saquia al Hamra, 모리타니에서는 남부 또는 Oued ad Dahab이 있습니다. 하산 2세는 뛰어난 지략과 심오한 현실주의로서 서사하라 남부를 우방국인 모리타니에 "포기"하는데 동의했는데, 이는 사하라 유사 국가의 창설을 보는 위험을 감수하기보다는 모리타니의 동맹국이 되기 위해서였다. 알제리와 폴리사리오(Polisario)는 이에 대항하려고 하였으며, 이전의 스페인 영토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1970년 이래 국제 정치에서 하산 2세의 또 다른 주요 조치는 중동 평화를 위한 아랍-이스라엘 화해였다. 1981년 3월, 이스라엘 야당 지도자 시몬 페레스를 마라케시에서 영접함으로써 주권자는 이스라엘과 아랍 이웃 국가들 사이에 평화를 확립하기 위한 긴 길을 열었다. 일찍이 1982년에 그는 사우디 아라비아의 파드 국왕에게 이스라엘에 대한 아랍의 정책이 교착 상태에 빠져 있으며 유대 국가와의 대화가 시작되어야 한다고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1984년 8월, 미들 아틀라스(Middle Atlas)의 이프란(Ifrane)에 있는 자신의 궁전에서 최초의 이스라엘-이집트 정상회담을 주최한 사람도 바로 그였다. 하산 2세는 자신의 업적을 통해 영향력 있는 모로코 유태인 디아스포라의 동맹이 되었으며, 심지어 유태인 공동체의 구성원을 성직자나 고문으로 선택하기까지 했다. 이것이 그가 에사우이라(Essaouira)에서 태어난 모로코계 유대인 앙드레 아줄레(André Azoulay)를 경제 및 재정 문제 고문으로 임명했고 모하메드 6세의 통치 기간 동안 여전히 이 직책을 유지한 방법입니다.
외교적, 경제적 측면에서 하산 2세는 모로코와 유럽의 화해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실제로 유럽연합은 20년 이상 모로코의 주요 무역 파트너로 자리매김하며 수출의 6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1999년 7월 23일, 하산 2세가 사망했다. 그의 장남 시디 모하메드는 모하메드 6세라는 이름으로 왕으로 선포되었다. 그는 정치적으로 안정된 나라를 물려받았고, 그의 아버지는 왕국 제도의 현대화와 수많은 개혁을 착수했다.
그의 거창한 정치 업적 외에도 하산 2세는 예술을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궁전의 건설과 장식을 위해 모로코 장인을 요청함으로써 군주는 자신을 예술의 진정한 후원자로 제시했습니다. 이 후원의 봉헌은 카사블랑카의 웅장한 하산 2 세 모스크 건설과 함께 21 세기 전야에 이루어졌습니다. 따라서 군주는 수천 명의 장인의 재능에 경의를 표하고 조상의 기술을 인정받을 수 있었습니다.
모로코는 전통 건축의 재료, 기술 및 장식 레퍼토리의 다양성, 풍부함으로 인해 수세기에 걸쳐 극도의 복잡성, 기하학 및 정교함이 남아있는 건축 언어를 개발할 수 있었던 이슬람 세계에서 몇 안 되는 국가 중 하나입니다.
Mohamed VI (모하메드 6세 : 1999년 - 현재)
모하메드 6세(아랍어: محمد السادس, 로마자: Muḥammad as-sādis, 베르베르어: ⵎⵓⵃⵎⴷ ⵡⵉⵙⵙ ⵚⴹⵉⵚ, 로마자: Muḥmmd wiss ṣḍiṣ, 1963년 8월 21일 출생)는 모로코의 왕이다. 알라위 왕조의 일원이었던 그는 1999년 7월 23일 아버지 하산 2세가 사망하자 왕위에 올랐다.
모하메드 6세의 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그에게 종교적, 정치적 교육을 제공하는 데 열심이었다. 4살 때 그는 왕궁에 있는 꾸란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교육 일과는 오전 6시에 한 시간 동안 꾸란을 암송하는 것으로 시작되었으며 공식 수업이 이어졌습니다. 그는 궁전의 요새화 된 벽 안에 건설된 왕실학교인 Collège Royal에서 첫 번째 초등 및 중등 연구를 마쳤습니다. 모하메드 6세는 언어에 뛰어났다.
1981년 학사 학위를 취득한 후 1985년 라바트 모하메드 V 대학교에서 법학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의 연구 논문은 "국제 관계 문제에서 아랍-아프리카 연합과 모로코 왕국의 전략"을 다루었습니다. 그는 또한 임페리얼 칼리지와 라바트 대학교에 다녔습니다.
1985년 11 월 26 일 모로코 왕립 육군의 대령 소령으로 임명되었습니다.
1987년 모하메드 6세는 정치학 분야에서 처음으로 CES(Certificat d'Études Supérieures)를 취득했다.
1988년 7월에는 공법 분야에서 DEA(Diplôme d'Études Approfondies)를 취득했다.
1988년 11월, 그는 브뤼셀에서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위원장인 자크 들로르(Jacques Delors) 집무실에서 견습했습니다. "EEC-마그레브 관계"에 대한 논문으로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1994년 7월 12일, 그는 소장으로 진급했고, 같은 해 그는 문화 고등 평의회 의장과 모로코 왕립 육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1999년 7월 23일, 아버지가 사망한 후 모하메드 6세가 왕위에 올랐고 7월 30일 라바트에서 대관식을 치렀다.
즉위 직후 모하메드 6세 국왕은 전국 TV 연설을 통해 빈곤과 부패 척결을 약속하는 한편 일자리를 창출하고 모로코의 인권 상황을 개선하겠다고 약속했다. 그의 개혁주의적 수사학은 이슬람 보수주의자들의 반대를 받았고, 그의 개혁 중 일부는 근본주의자들을 분노하게 했다.
2004년 2월, 그는 여성에게 더 많은 권한을 부여하는 새로운 가족법, 즉 무다와나(Mudawana)를 제정했다.
모하메드 6세는 또한 하산 2세 치하의 인권 침해를 조사하는 임무를 맡은 평등과 화해 위원회(IER)를 창설했다.
모하메드 6세는 모로코의 외교 정책에서 아프리카 관계를 점점 더 우선시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모로코는 걸프 협력 회의(Gulf Cooperation Council)뿐만 아니라 중국과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다른 비전통적 강대국과의 파트너십을 승인하여 무역 연계와 외국인 투자를 다각화하고 서방, 특히 유럽 연합(EU)에 대한 모로코의 전통적인 의존도를 제한하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모로코는 또한 리비아 위기에서 중재자 역할을 제안했으며 카타르 외교 위기에서 중립을 유지했습니다.
부시 행정부는 2004년 모로코를 미국의 주요 비나토 동맹국으로 지정했다. 모하메드 6세는 앞서 2000년 6월 백악관을 방문했고, 빌 클린턴 대통령과의 국빈 만찬에 참석한 바 있다. 워싱턴과 라바트는 나중에 2006년에 미국과 아프리카 국가 간의 유일한 자유 무역 협정에 서명했는데, 이는 무역 적자 증가로 인해 모로코 내에서 약간의 비판에 직면했습니다.
모로코와 이스라엘은 2020년 12월 10일 미국이 참여한 이스라엘-모로코 관계 정상화 협정의 일환으로 외교 관계를 복원했으며, 동시에 서사하라에 대한 모로코의 주권을 인정했다.
2021년 11월 팔레스타인 인민과의 국제 연대의 날에 모하메드는 모로코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평화 협상의 재개를 계속 추진할 것이라고 발표했습니다. 그는 양측에 "평화 프로세스를 방해하는 행동을 자제할 것"을 촉구했다.
모하메드 6세의 화해 요청에도 불구하고, 이웃 알제리와의 관계는 그의 통치 기간 동안 계속 강화되었다. 2004년 7월 모하메드는 모로코가 알제리인에 대한 비자 제한을 해제할 것이라고 발표했으며 알제리 대통령 압델라지즈 부테플리카는 2005년에 이 조치에 보답했습니다. 그러나 이2020년대에 주로 이스라엘-모로코 정상화 협정과 게르게라트 국경 충돌의 결과로 알제리와 긴장이 점차 고조되었습니다. 2021년 8월, 알제리는 모로코가 알제리 북부의 카빌리 지역 반정부 운동을 지원했다고 비난했고, 이후 모로코와의 외교 관계를 단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