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aouite Dynasty (알라윗 왕조)
AD 1661-
Alaouite 왕조 (아랍어 : سلالة العلويين الفيلاليين, Sulālat al- 'Alawiyyīn al-Fīlālīyn)는 현재 모로코 왕실이다.
오늘날에도 모하메드 6세 국왕(Mohammed VI)이 모로코를 통치하고 있는 알라위(Alawit) 왕조는 아라비아의 얀보(Yanbo)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왕조의 조상은 13세기 초 두 번째 메리니드(Merinids) 술탄 아부 야쿱 유세프(Abu Yacoub Youssef, 1286-1307)의 통치 시대 때 타필라렛(Tafilalet)에 도착한 예언자의 후손인 하산 알 다킬(Hassan al-Dakhil)이었습니다. 그는 셰리프(Sherifian, 아랍 정통혈통) 가문의 후손으로 모로코에서 존경을 누렸습니다. 그 후 타필라렛(Tafilalat)은 알라위족의 거점이 되었습니다. 모로코가 총체적 무정부 상태에 빠졌을 때 사디(Saadi)인들이 이를 극복하지 못하자 알라위파 족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물레이 셰리프(Moulay Chérif, 1631-1636)와 물레이 모하메드(1636-1664) 1631년 52세의 나이에 물레이 셰리프는 타필랄레 주민들로부터 드라(Draa) 지역의 자우이아 세력의 확장으로 위협받는 지역의 방어 사령관을 맡게 됩니다. 타필라레의 수장인 물레이 셰리프는 사드 왕조의 마지막 왕들에 맞서 반기를 든 최초의 셰리프(Sherifian)였습니다. 사령관으로 임명된 지 5년 후, 그는 물러났고 그의 아들 중 한 명인 물레이 모하메드(Moulay Mohammed)가 필랄리언(Filalians)들에 의해 후계자로 선택되었습니다. 그는 타필라렛(Tafilalat)에서 라이벌을 제거하면서까지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한 후 필랄리언의 거점을 물루야(Moulouya)와 드라(Draa) 계곡으로 확장하는 데 성공하고 술탄으로 선포되었습니다. 미래 알라파 권력의 토대를 마련한 것은 물레이 모하메드(Moulay Mohammed)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후 그의 동생 물레이 라쉬드(Moulay Rachid)가 그의 업적을 완료했습니다.
물레이 라쉬드(Moulay Rachid, 1664-1672) 통치시대
물레이 모하메드(Moulay Mohammed)의 동생인 물레이 라쉬드(Moulay Rachid)는 알라윗(Alawit) 왕조의 진정한 건국자였습니다. 1664년부터 1672년까지 10년도 채 되지 않아 물레이 라쉬드는 시질마사(Sijilmassa)에서 물루야(Moulouya) 계곡 아래까지 이어지는 캐러밴 루트 전체를 장악하는 것을 시작으로 모로코 전역을 장악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이 루트는 한편으로는 지중해와 사하라 사막을 연결하는 통로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모로코의 사하라 횡단 무역로에서 얻은 수익으로 물레이 라쉬드가 군사 작전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고 군대를 무장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전략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했습니다. 1668년, 그는 드라(Draa)의 강력한 자우이아 세력을 제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심장부인 드라(Draa) 마을을 점령한 후 폐허로 만들었습니다. 이듬해 마라케시는 정복되었고, 1670년에는 일리그 자우이아도 함락되었습니다. 이 덕분에 물레이 라쉬드는 오랜 기간의 무정부 상태를 종식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정치적으로 모로코는 점차 재건되었습니다. 문필가이자 현명한 정치가였던 그는 페즈에 이슬람 서부에서 가장 큰 메데르사인 알-체라틴(al-Cherratin) 메데르사(madrasa)를 설립했습니다. 1672년부터 그는 자신의 통치 기간 동안 평화를 누렸던 페즈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는 페스 지디드(Fez Jdid) 북쪽에 위치한 체라다(Cherada)의 카스바(Qasba, 요새)와 알-체라틴(재단사)의 메데르사, 세부강을 가로지르는 대형 다리를 건설했습니다. 물레이 라쉬드는 마흔두 살의 나이에 말에서 떨어지는 사고로 갑자기 사망했고, 더 이상 그가 야심적으로 추진 중 이였던 국기재건 사업은 멈추고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그의 동생인 물레이 이스마일(Moulay Ismail)이 왕권을 넘겨받았지만 모로코는 매우 내부적으로 불안전한 상태였습니다.
물레이 이스마일 (Moulay Ismail, 1672-1727) 통치시대
물레이 라쉬드의 이복형제이자 그의 두터운 신임을 받은 물레이 이스마일은 물레이 라쉬드가 남쪽에서 싸우는 동안 모로코 북부 지역 사령관을 맡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총독으로 있던 도시 메크네스(Meknes)에 술탄으로 선포되었습니다. 물레이 이스마일의 통치는 시작부터 매우 어려웠습니다. 모로코를 안정시키고 무정부 상태와 특정주의를 극복하고 반대 세력 종교단의 위협적인 힘을 약화시키는 데 거의 20년이 넘게 걸렸습니다. 그 후 그는 모로코의 정치적 통합을 회복하는 데 드디어 성공했습니다. 그는 모리타니(Mauritania)와 투아트(Touat) 지역에서도 자신의 권위를 확립했습니다. 오랜 통치 기간 동안 물레이 이스마일은 강력한 군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이러한 국내 문제 외에도 물레이 이스마일은 모로코의 기독교 세력에 대항하는 성전인 지하드도 관여했습니다. 1681년 메흐디야(Mehdia), 1684년 탕헤르(Tanger), 1689년 라라쉬(Larache), 1691년 아르질라(Asilah) 등 10년 동안 포르투갈 군의 점령지와 영국군의 요새를 무력으로 모두 탈환했습니다. 그러나 유일하게 예외로 마자간(Mazagan)은 1769년까지 포르투갈 영토로 남아있었습니다. 오스만 제국의 위협에 직면한 물레이 이스마일은 모로코의 동쪽 국경을 요새와 방어용 카스바(성)을 쌓아 방어하는 데 성공하고 타자(Taza) 도시를 중심으로 한 군사 체계를 완성했습니다.
이 위대한 왕의 업적 중 하나는 강력한 군대를 양성한 것입니다. 이 군대는 흑인 노예군, 부족들 산하 사병, 외국인 용병 등으로 나뉘어집니다. 물레이 이스마일은 상비군을 창설하여 전국의 요새와 성에 파견했습니다. 그리고 여러 부족들은 사병들은 군 복무의 대가로 토지를 받는 일종의 봉건적 계약 관계였습니다. 외국인 용병들은 때때로 포병이나 공병과 같은 기술 병력의 일부를 구성하거나 전투에서 선봉 부대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외부 적으로 물레이 이스마일 통치하에 모로코는 유럽에 중요한 무역 파트너였으며 유럽은 모로코를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로 간주했습니다. 무역 및 포로 석방과 관련하여 모로코는 프랑스 및 영국과 대사관 상호설치 협정을 맺습니다. 주요 유럽 국가들은 영사를 모로코에 상주시켰습니다. 한편, 이번에 남쪽으로 방향을 틀은 물레이 이스마일은 모리타니와 투아트에서 자신의 권위와 영향력을 확립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모로코와 세네갈 강 계곡, 니제르 강 루프를 잇는 사하라 횡단 무역로에서는 이제 모로코 화폐와 무게 및 측정 단위를 기준으로 거래가 이루어졌습니다. 트라르자의 무어족 주민들은 모리타니와 마찬가지로 물레이 이스마일을 자신들의 영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물레이 이스마일이 사망한 후 후계자 쟁탈전으로 인해 모로코는 또다시 무정부 상태와 혼란이 일어났습니다. 거의 30년(1727-1757) 동안 국가 재정은 바닥이 났고 식량 위기, 심지어 기근의 발병으로 이어졌습니다. 물레이 이스마일의 아들 일곱 명이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모로코 전역에서 내전이 발발했습니다. 그 사이에 열두 번이나 왕이 바뀌었습니다. 물레이 압달라는 왕위에 즉위했다가 다섯 번이나 전복되었습니다. 페즈 주민들의 반란을 진압해야 했던 그는 페즈 남쪽에 요새화된 모스크인 다르 다비바그(Dar Dabibagh, 작은 무두장이의 집)를 짓고 성벽의 일부를 해체했습니다. 그는 또한 페즈에 퐁두크(fondouk, 분수)와 네자린(Nejjarin) 구역을 만들었습니다. 1732년에는 페스-지디드(Fez Jdid)에 물레이 압달라 모스크를 지었습니다. 이 황실 모스크는 대부분의 알라윗 가문의 왕족 묘지와 인접했습니다.
메크네스(Meknes) 도시에서 그는 화려했던 마디나트 알 리야드(Madinat al-Riyad) 지역을 파괴했고 밥 알 만수르(Bab al-Mansour) 성벽을 만들었습니다.
초기 알라윗(Alawits) 왕조의 업적
알라위 최초의 위대한 군주인 물레이 라쉬드는 정치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문명화 사업에 몰두했습니다. 문필가이자 현명한 정치가였던 그는 페즈에 이슬람 서부에서 가장 큰 메데르사인 알-체라틴 메데르사(테일러즈)를 설립했습니다. 1672년부터 그는 자신의 통치 기간 동안 평화를 누렸던 페즈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는 페스 지디드 북쪽에 카스바 데 체라다를 건설하고 세부강을 가로지르는 큰 다리를 건설했습니다. 알 체라틴(Al-Cherratin)의 메데르사(madrasa), 라바트의 우다야(Oudaya), 물레이 라쉬드의 작품 일부, 알 마라카 등 여러 왕실 거주지는 모두 알라위 왕조 예술의 특징을 잘 보여줍니다. 이전 시대의 업적을 계승하는 동시에 테마의 통일성에 대한 열망, 실행의 웅장함에 대한 취향, 고전을 깨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공식을 추가하여 새로운 과정을 강조하려는 관심 등 알라윗트 창작의 특징이 될 새로운 방향이 이미 드러난 것이었습니다. 삼나무, 페인트 칠한 목재, 젤리 및 장식용 목공예품의 사용은 과거보다 더 광범위했습니다. 알라윗 문명의 진정한 붐이 시작된 것은 물레이 이스마일의 통치 아래서였습니다. 그는 메크네스를 수도로 삼아 제국의 도시로 격상시켰습니다. 메크네스는 모스크, 궁전, 기념비적인 문, 별궁, 분수대 등이 건설되면서 전례 없는 도시 개발이 이루어졌습니다. 위대한 건축가이자 종교심이 깊었던 그는 카스바, 밥 베르다인, 지투나, 부 아자, 시디 사이드 모스크, 라크다르 모스크, 다양한 영묘를 세웠습니다. 물레이 이스마일 시대의 예술은 위풍당당하고 강력했습니다. 그는 또한 메크네스를 모로코에서 가장 요새화된 도시로 만들었는데, 길이 40킬로미터가 넘는 성벽에 기념비적인 성문을 만들었고 성 안에 수많은 별궁이 배치되어 있으며, 그 가운데에는 광활한 녹지 공간과 함께 별궁과 식량, 마구, 무기 저장고 등 다양한 별관 건물이 세워져 있습니다. 주변 지역에는 광활한 초원(Agdal)과 과수원이 단지를 둘러싸고 있어 마치 천국 같은 느낌을 줍니다. 풍부한 장식과 다양한 형태 및 재료 덕분에 이 도시는 "모로코의 베르사유"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변화의 시작을 알리는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시디 모하메드 벤 압달라 (Sidi Mohammed ben Abdallah, 1757~1790) 통치 시대
1757년, 아버지 물레이 압달라(Moulay Abdallah)가 사망하자 마라케시 총독 시디 모하메드 벤 압달라(인 Sidi Mohammed ben Abdallah)가 왕위를 계승했습니다. 사디 왕조의 술탄 알 만수르(al Mansour)를 존경했던 이 술탄은 군대를 직접 지휘하고 부족들의 관리 질서를 재확립하고 체리피안의 권위를 회복하고 황폐해진 나라를 재건해야하는 무거운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의 최우선 과제 중 하나는 무정부 상태에 부분적으로 책임이 있는 아비드(abids, 흑인노예 근위대) 세력의 권력을 무너뜨리는 것이었습니다. 술탄은 여러 차례에 걸쳐 아비드를 학살했고, 15,000명만 여러 주둔지로 나누어 베르베르족이나 귀치족 신병들과 함께 그곳에서 살도록 강요했습니다. 모로코 해안선의 특정 지점에서 기독교인의 존재를 없애고 싶었던 시디 모하메드 벤 압달라는 유럽 국가들의 해상 보복을 우려하여 해안 도시를 요새화하고 포병을 상주시켰습니다. 시디 모하메드 벤 압달라가 1769년 포르투갈이 점령하고 있던 마자간(Mazagan)을 싸울 필요도 없이 정복했습니다. 그는 군사들이 마자간을 포위했고 포르투갈은 크게 쓸모없는 이곳에서 스스로 철수를 결정합니다. 그 후 시디 모하메드 벤 압달라(Sidi Mohammed ben Abdallah)는 모로코의 무역 파트너 국가들의 수를 점차 늘리기 시작했습니다. 통치 기간 동안 시디 모하메드 벤 압달라 국왕은 대서양 연안에 여러 항구를 건설하고 모스크, 학교, 함맘, 성벽 등을 건설하여 안파(Anfa, 카사블랑카) 지역에 활기를 불어넣었습니다. 카사블랑카 항구의 현대화와 인프라 구축은 1765년 에사우이라(Essaouira Mogador, 모가도르) 도시의 설립과 마찬가지로 술탄의 대외 개방 정책의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는 모로코의 대외 무역 대부분을 자신이 쉽게 통제할 수 있는 항구로 집중시키고자 했습니다. 모가도르만은 이상적인 장소로 보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현실화하기 위해 툴롱(Toulon) 출신의 프랑스인 건축가 프랑수아 코르누(François Cornut)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유럽의 주요 항구와 무역 노선을 신설하고 모로코의 국가 위상을 선전하는 것 이였습니다. 시디 모하메드 벤 압달라 국왕은 모로코에 현대적이고 경쟁력 있는 대규모 항구를 건설하고 싶었습니다. 이 와중에 유명한 건축가이자 도시 계획가인 프랑수아 코르누는 1766년 라라슈(Larache) 재난 당시 포로로 잡혀왔던 상태였습니다. 그는 400명의 기독교인 포로들의 도움으로 이 도시를 요새화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도시의 레이아웃은 유럽 모델을 기반으로 했습니다. 시디 모하메드 벤 압발라는 정치와 전략에 대한 천재적인 재능 외에도 알라윗 왕조의 위대한 건축가 중 한 명이었어요. 그는 마라케시에 큰 애정을 보였는데, 카스바 지역의 건설 및 재건 공사와 아그달 정원 및 다양한 성역을 복원하는 작업을 수행했습니다. 또한 알 아자르 또는 알 루아 모스크, 베르다인 및 베니마 모스크, 시디 모하메드 벤 아이사 및 시디 부 오스만의 영묘 등 메크네스에 수많은 종교 건축물을 건축했습니다. 라바트에서는 알 수나 모스크의 기초 공사가 시작되었고 왕궁이 지어졌습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페즈시는 진정한 르네상스를 맞이했습니다. 여러 모스크와 연설장이 지어졌습니다. 그는 부아나니야 모스크도 복원했습니다. 시디 모하메드 벤 압달라가 손대지 않은 주요 도시는 없는 거의 없고 흔적은 모로코 전역에 걸쳐서 남아있습니다. 177-1780년 사이에 가뭄(1776~1782년)과 전염병 대유행(1797~1800년)으로 인해 모로코는 인구학적 대재앙과 대대적인 인구 이동이 발생했습니다. 가장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이 25년 동안 모로코 인구의 절반이 사망했으며, 이로 인해 많은 마을이 지도에서 사라지고 전염병의 영향을 덜 받는 지역으로 이주하는 이들로 인해 사회적 전반에 걸쳐 큰 위기가 닥쳤습니다. 16세기 초 500만 명에 달하던 모로코의 인구는 300만 명 이하로 감소했습니다. 그러나 이 재앙은 자우이아족의 부활로 이어졌습니다. 1790년 시디 모하메드 벤 압달라가 사망하면서 모로코는 재건되었지만, 분열의 씨앗이 남아 자우이아족의 세력이 커졌습니다.
물레이 야지드의 (Moulay Yazid, 1790-1792) 통치시대
시디 모하메드(Sidi Mohammed)의 후계자로 지명된 물레이 야지드(Moulay Yazid)는 아버지에 대한 일련의 반란과 반란을 일으키며 모험적이고 때로는 스캔들을 일으키는 삶을 살았습니다. 물레이 야지드의 짧은 통치 기간은 모로코 남부에서 일어난 봉기, 마라케시에서 술탄으로 선포된 형제 중 한 명, 수스와 타필라렛에서 일어난 또 다른 형제들의 반란으로 특징지어집니다. 물레이 야지드는 엄청난 폭력과 잔인함으로 반응했습니다. 그는 약탈당한 마라케시를 탈환하고 반대세력을 학살했습니다. 그러나 그후 물레이 야지드는 전투에서 전사했습니다. 모로코는 1797년까지 분열된 상태로 위태로운 시기를 맞게 됩니다.
물레이 슬리메인의 통치(Moulay Slimane, 1792-1822)
시디 모하메드 벤 압달라 술탄의 아들인 물레이 슬리마네는 긴 통치 기간(30년) 초반에 모로코 남부 일부 지역에서 술탄으로 인정받은 물레이 히삼과 타필라렛의 또다른 영토에서 군림한 압데라흐마네라는 두 형제와 싸워야 했습니다. 그들에게 그의 승리한 이후에도 세 가지 새로운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1810년경에 발생한 산악 지역의 및 베르베르족 내란 위기(리프, 중부 및 북부 아틀라스, (Rif, Middle and High Atlas)), 자우이아(zaouias) 세력의 부활로 인한 종교적 위기, 마지막으로 앞선 두 위기가 종합된 왕권 위기가 그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물레이 슬리만은 특정 지역의 가문들(특히 Derkaoua와 Tijanya)과 손을 잡고 연합합니다. 리프 반란군은 1813 년경에 진압되었습니다. 베르베르족의 아이트 아타(Ait Atta) 부족은 1816년 타필라레(Tafilalet) 지역의 일부를 장악했습니다. 아틀라스 중부의 봉기는 이 지역의 모든 산하자(Sanhaja)와 제넷(Zenet) 부족이 아부 바크르 암하우치라는 아이트 시디 알리 지도자를 중심으로 단결한 가장 큰 봉기였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술탄에 대항하여 단결하고 젬무르(Zemmour) 세력과 합류했습니다. 1818년, 술탄의 군대는 이 연합군에 의해 패배했고, 물레이 슬리만은 포로로 잡혔으며 그의 아들 물레이 브라힘은 살해당했습니다. 나흘 간 포로로 잡혀 있는 동안 술탄은 이슬람 선지자(모하메드)의 후손으로서 반란군에 의해 풀려나기 전까지 존경받는 대우를 받았습니다. 이제 베르베르 산맥의 지배자가 된 암하우치(Amhaouch)는 1820년 페즈에 입성하여 술탄과 전쟁을 벌이고 있던 우에잔 세력의 지도자들을 만나서 동맹에 합의했습니다. 국제적인 측면에서 물레이 슬리만(Moulay Slimane)은 대외 무역이 감소한 1805년까지 시디 모하메드 벤 압달라(Sidi Mohammed ben Abdallah) 정책을 따랐습니다. 19세기 초, 이러한 경제적 쇠퇴는 모로코 빈곤의 큰 원인이며 그후 고립과 철수 정책이 시작되었습니다. 물레이 슬리만은 전임자들과 마찬가지로 종교 건축물의 건설과 복원에 착수했습니다. 페즈에서는 위대한 알-알시프 모스크인 밥 귀사(Bab Guissa) 성문과 메데르사(madrasa)를 세웠고, 위풍당당한 저택인 다르 물레이 슬리먼(Dar Moulay Slimane)의 건축을 맡기도 했습니다. 또한 페즈의 다르 알 마흐젠(dar al Makhzen)에서 요새에 성벽을 쌓는 일을 수행했습니다. 19세기 초, 라바트에는 알 쿠바(al-Qubba mosque) 모스크와 물레이 슬리만 모스크가 세워졌습니. 물레이 슬리메인의 통치 말기는 중앙 권력의 약화 현상이 특징입니다. 1822년 술탄은 내전에서 다시 패배했고 승리자인 자우이아 체라디야(zaouia cherradiya)은 그를 죽이지 않고 풀어주었습니다. 마라케시로 돌아온 물레이 슬리만은 이제 모든 명성을 잃었고 조카 중 한 명인 동생 물레이 히삼의 아들 물레이 압데라흐만 벤 히삼(Moulay Abderrahmne ben Hicham)을 후계자로 선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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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derrahmane(1822-1859) 왕 시가에서 모로코는 유럽 강국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모로코가 Emir Abd al-Qadir(알제리 독립 운동 지도자)을 지지하고 그의 망명을 받아주자 1844 년에 Isly의 전투에서 프랑스 군에 의해 공격받고 패배하여 Emir Abd al-Qadir지지를 포기했다.
Muhammad IV (1859-1873)와 Hassan I (1873-1894)의 통치 기간에 알라윗 왕조는 무엇보다도 유럽 국가와 미국과의 무역 관계를 장려했다. 베르베르 족과 사하라 베두인 부족에 대한 통제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프랑스 군대의 긴밀한 협조하에 모로코 군대 및 행정부 근대화에 착수했다. 모로코 북부를 정령하고 있었던 스페인과의 전쟁(1859-1860) 패배 후 서유럽 여러 나라들이 모로코 문제에 직접적으로 관여하기 시작했다. 마드리드 조약(1880)에서 모로코의 독립성이 보장되었지만, 프랑스는 더 큰 영향력을 얻었다. 이처럼 커져가는 영향력에 대응하기 위한 독일의 모로코 영향력 시도(1905-1906년)로 인해서 모로코는 첫 번째 위기와 1911년의 두 번째 모로코 위기를 초래했습니다. 1906년 스페인 남부 알헤스라스에서 열린 협상에서 서유럽 강대국들(영국-프랑스-스페인-독일) 간에 가까스로 외교적 타협을 보았다.
결국 모로코 국왕은 1912년 12월 3일에 페스(Fes)조약에 서명을 통해 프랑스 보호령을 인정해야만 했다. 동시에 북부 모로코의 Rif 지역은 스페인 지배하에 들어갔다.
모로코는 그후부터 프랑스의 지배하에 있다가 1956년 3월 2일에 드디어 독립했다.
AD 1661-
Alaouite 왕조 (아랍어 : سلالة العلويين الفيلاليين, Sulālat al- 'Alawiyyīn al-Fīlālīyn)는 현재 모로코 왕실이다.
오늘날에도 모하메드 6세 국왕(Mohammed VI)이 모로코를 통치하고 있는 알라위(Alawit) 왕조는 아라비아의 얀보(Yanbo)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왕조의 조상은 13세기 초 두 번째 메리니드(Merinids) 술탄 아부 야쿱 유세프(Abu Yacoub Youssef, 1286-1307)의 통치 시대 때 타필라렛(Tafilalet)에 도착한 예언자의 후손인 하산 알 다킬(Hassan al-Dakhil)이었습니다. 그는 셰리프(Sherifian, 아랍 정통혈통) 가문의 후손으로 모로코에서 존경을 누렸습니다. 그 후 타필라렛(Tafilalat)은 알라위족의 거점이 되었습니다. 모로코가 총체적 무정부 상태에 빠졌을 때 사디(Saadi)인들이 이를 극복하지 못하자 알라위파 족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물레이 셰리프(Moulay Chérif, 1631-1636)와 물레이 모하메드(1636-1664) 1631년 52세의 나이에 물레이 셰리프는 타필랄레 주민들로부터 드라(Draa) 지역의 자우이아 세력의 확장으로 위협받는 지역의 방어 사령관을 맡게 됩니다. 타필라레의 수장인 물레이 셰리프는 사드 왕조의 마지막 왕들에 맞서 반기를 든 최초의 셰리프(Sherifian)였습니다. 사령관으로 임명된 지 5년 후, 그는 물러났고 그의 아들 중 한 명인 물레이 모하메드(Moulay Mohammed)가 필랄리언(Filalians)들에 의해 후계자로 선택되었습니다. 그는 타필라렛(Tafilalat)에서 라이벌을 제거하면서까지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한 후 필랄리언의 거점을 물루야(Moulouya)와 드라(Draa) 계곡으로 확장하는 데 성공하고 술탄으로 선포되었습니다. 미래 알라파 권력의 토대를 마련한 것은 물레이 모하메드(Moulay Mohammed)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후 그의 동생 물레이 라쉬드(Moulay Rachid)가 그의 업적을 완료했습니다.
물레이 라쉬드(Moulay Rachid, 1664-1672) 통치시대
물레이 모하메드(Moulay Mohammed)의 동생인 물레이 라쉬드(Moulay Rachid)는 알라윗(Alawit) 왕조의 진정한 건국자였습니다. 1664년부터 1672년까지 10년도 채 되지 않아 물레이 라쉬드는 시질마사(Sijilmassa)에서 물루야(Moulouya) 계곡 아래까지 이어지는 캐러밴 루트 전체를 장악하는 것을 시작으로 모로코 전역을 장악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이 루트는 한편으로는 지중해와 사하라 사막을 연결하는 통로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모로코의 사하라 횡단 무역로에서 얻은 수익으로 물레이 라쉬드가 군사 작전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고 군대를 무장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전략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했습니다. 1668년, 그는 드라(Draa)의 강력한 자우이아 세력을 제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심장부인 드라(Draa) 마을을 점령한 후 폐허로 만들었습니다. 이듬해 마라케시는 정복되었고, 1670년에는 일리그 자우이아도 함락되었습니다. 이 덕분에 물레이 라쉬드는 오랜 기간의 무정부 상태를 종식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정치적으로 모로코는 점차 재건되었습니다. 문필가이자 현명한 정치가였던 그는 페즈에 이슬람 서부에서 가장 큰 메데르사인 알-체라틴(al-Cherratin) 메데르사(madrasa)를 설립했습니다. 1672년부터 그는 자신의 통치 기간 동안 평화를 누렸던 페즈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는 페스 지디드(Fez Jdid) 북쪽에 위치한 체라다(Cherada)의 카스바(Qasba, 요새)와 알-체라틴(재단사)의 메데르사, 세부강을 가로지르는 대형 다리를 건설했습니다. 물레이 라쉬드는 마흔두 살의 나이에 말에서 떨어지는 사고로 갑자기 사망했고, 더 이상 그가 야심적으로 추진 중 이였던 국기재건 사업은 멈추고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그의 동생인 물레이 이스마일(Moulay Ismail)이 왕권을 넘겨받았지만 모로코는 매우 내부적으로 불안전한 상태였습니다.
물레이 이스마일 (Moulay Ismail, 1672-1727) 통치시대
물레이 라쉬드의 이복형제이자 그의 두터운 신임을 받은 물레이 이스마일은 물레이 라쉬드가 남쪽에서 싸우는 동안 모로코 북부 지역 사령관을 맡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총독으로 있던 도시 메크네스(Meknes)에 술탄으로 선포되었습니다. 물레이 이스마일의 통치는 시작부터 매우 어려웠습니다. 모로코를 안정시키고 무정부 상태와 특정주의를 극복하고 반대 세력 종교단의 위협적인 힘을 약화시키는 데 거의 20년이 넘게 걸렸습니다. 그 후 그는 모로코의 정치적 통합을 회복하는 데 드디어 성공했습니다. 그는 모리타니(Mauritania)와 투아트(Touat) 지역에서도 자신의 권위를 확립했습니다. 오랜 통치 기간 동안 물레이 이스마일은 강력한 군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이러한 국내 문제 외에도 물레이 이스마일은 모로코의 기독교 세력에 대항하는 성전인 지하드도 관여했습니다. 1681년 메흐디야(Mehdia), 1684년 탕헤르(Tanger), 1689년 라라쉬(Larache), 1691년 아르질라(Asilah) 등 10년 동안 포르투갈 군의 점령지와 영국군의 요새를 무력으로 모두 탈환했습니다. 그러나 유일하게 예외로 마자간(Mazagan)은 1769년까지 포르투갈 영토로 남아있었습니다. 오스만 제국의 위협에 직면한 물레이 이스마일은 모로코의 동쪽 국경을 요새와 방어용 카스바(성)을 쌓아 방어하는 데 성공하고 타자(Taza) 도시를 중심으로 한 군사 체계를 완성했습니다.
이 위대한 왕의 업적 중 하나는 강력한 군대를 양성한 것입니다. 이 군대는 흑인 노예군, 부족들 산하 사병, 외국인 용병 등으로 나뉘어집니다. 물레이 이스마일은 상비군을 창설하여 전국의 요새와 성에 파견했습니다. 그리고 여러 부족들은 사병들은 군 복무의 대가로 토지를 받는 일종의 봉건적 계약 관계였습니다. 외국인 용병들은 때때로 포병이나 공병과 같은 기술 병력의 일부를 구성하거나 전투에서 선봉 부대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외부 적으로 물레이 이스마일 통치하에 모로코는 유럽에 중요한 무역 파트너였으며 유럽은 모로코를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로 간주했습니다. 무역 및 포로 석방과 관련하여 모로코는 프랑스 및 영국과 대사관 상호설치 협정을 맺습니다. 주요 유럽 국가들은 영사를 모로코에 상주시켰습니다. 한편, 이번에 남쪽으로 방향을 틀은 물레이 이스마일은 모리타니와 투아트에서 자신의 권위와 영향력을 확립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모로코와 세네갈 강 계곡, 니제르 강 루프를 잇는 사하라 횡단 무역로에서는 이제 모로코 화폐와 무게 및 측정 단위를 기준으로 거래가 이루어졌습니다. 트라르자의 무어족 주민들은 모리타니와 마찬가지로 물레이 이스마일을 자신들의 영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물레이 이스마일이 사망한 후 후계자 쟁탈전으로 인해 모로코는 또다시 무정부 상태와 혼란이 일어났습니다. 거의 30년(1727-1757) 동안 국가 재정은 바닥이 났고 식량 위기, 심지어 기근의 발병으로 이어졌습니다. 물레이 이스마일의 아들 일곱 명이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모로코 전역에서 내전이 발발했습니다. 그 사이에 열두 번이나 왕이 바뀌었습니다. 물레이 압달라는 왕위에 즉위했다가 다섯 번이나 전복되었습니다. 페즈 주민들의 반란을 진압해야 했던 그는 페즈 남쪽에 요새화된 모스크인 다르 다비바그(Dar Dabibagh, 작은 무두장이의 집)를 짓고 성벽의 일부를 해체했습니다. 그는 또한 페즈에 퐁두크(fondouk, 분수)와 네자린(Nejjarin) 구역을 만들었습니다. 1732년에는 페스-지디드(Fez Jdid)에 물레이 압달라 모스크를 지었습니다. 이 황실 모스크는 대부분의 알라윗 가문의 왕족 묘지와 인접했습니다.
메크네스(Meknes) 도시에서 그는 화려했던 마디나트 알 리야드(Madinat al-Riyad) 지역을 파괴했고 밥 알 만수르(Bab al-Mansour) 성벽을 만들었습니다.
초기 알라윗(Alawits) 왕조의 업적
알라위 최초의 위대한 군주인 물레이 라쉬드는 정치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문명화 사업에 몰두했습니다. 문필가이자 현명한 정치가였던 그는 페즈에 이슬람 서부에서 가장 큰 메데르사인 알-체라틴 메데르사(테일러즈)를 설립했습니다. 1672년부터 그는 자신의 통치 기간 동안 평화를 누렸던 페즈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는 페스 지디드 북쪽에 카스바 데 체라다를 건설하고 세부강을 가로지르는 큰 다리를 건설했습니다. 알 체라틴(Al-Cherratin)의 메데르사(madrasa), 라바트의 우다야(Oudaya), 물레이 라쉬드의 작품 일부, 알 마라카 등 여러 왕실 거주지는 모두 알라위 왕조 예술의 특징을 잘 보여줍니다. 이전 시대의 업적을 계승하는 동시에 테마의 통일성에 대한 열망, 실행의 웅장함에 대한 취향, 고전을 깨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공식을 추가하여 새로운 과정을 강조하려는 관심 등 알라윗트 창작의 특징이 될 새로운 방향이 이미 드러난 것이었습니다. 삼나무, 페인트 칠한 목재, 젤리 및 장식용 목공예품의 사용은 과거보다 더 광범위했습니다. 알라윗 문명의 진정한 붐이 시작된 것은 물레이 이스마일의 통치 아래서였습니다. 그는 메크네스를 수도로 삼아 제국의 도시로 격상시켰습니다. 메크네스는 모스크, 궁전, 기념비적인 문, 별궁, 분수대 등이 건설되면서 전례 없는 도시 개발이 이루어졌습니다. 위대한 건축가이자 종교심이 깊었던 그는 카스바, 밥 베르다인, 지투나, 부 아자, 시디 사이드 모스크, 라크다르 모스크, 다양한 영묘를 세웠습니다. 물레이 이스마일 시대의 예술은 위풍당당하고 강력했습니다. 그는 또한 메크네스를 모로코에서 가장 요새화된 도시로 만들었는데, 길이 40킬로미터가 넘는 성벽에 기념비적인 성문을 만들었고 성 안에 수많은 별궁이 배치되어 있으며, 그 가운데에는 광활한 녹지 공간과 함께 별궁과 식량, 마구, 무기 저장고 등 다양한 별관 건물이 세워져 있습니다. 주변 지역에는 광활한 초원(Agdal)과 과수원이 단지를 둘러싸고 있어 마치 천국 같은 느낌을 줍니다. 풍부한 장식과 다양한 형태 및 재료 덕분에 이 도시는 "모로코의 베르사유"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변화의 시작을 알리는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시디 모하메드 벤 압달라 (Sidi Mohammed ben Abdallah, 1757~1790) 통치 시대
1757년, 아버지 물레이 압달라(Moulay Abdallah)가 사망하자 마라케시 총독 시디 모하메드 벤 압달라(인 Sidi Mohammed ben Abdallah)가 왕위를 계승했습니다. 사디 왕조의 술탄 알 만수르(al Mansour)를 존경했던 이 술탄은 군대를 직접 지휘하고 부족들의 관리 질서를 재확립하고 체리피안의 권위를 회복하고 황폐해진 나라를 재건해야하는 무거운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의 최우선 과제 중 하나는 무정부 상태에 부분적으로 책임이 있는 아비드(abids, 흑인노예 근위대) 세력의 권력을 무너뜨리는 것이었습니다. 술탄은 여러 차례에 걸쳐 아비드를 학살했고, 15,000명만 여러 주둔지로 나누어 베르베르족이나 귀치족 신병들과 함께 그곳에서 살도록 강요했습니다. 모로코 해안선의 특정 지점에서 기독교인의 존재를 없애고 싶었던 시디 모하메드 벤 압달라는 유럽 국가들의 해상 보복을 우려하여 해안 도시를 요새화하고 포병을 상주시켰습니다. 시디 모하메드 벤 압달라가 1769년 포르투갈이 점령하고 있던 마자간(Mazagan)을 싸울 필요도 없이 정복했습니다. 그는 군사들이 마자간을 포위했고 포르투갈은 크게 쓸모없는 이곳에서 스스로 철수를 결정합니다. 그 후 시디 모하메드 벤 압달라(Sidi Mohammed ben Abdallah)는 모로코의 무역 파트너 국가들의 수를 점차 늘리기 시작했습니다. 통치 기간 동안 시디 모하메드 벤 압달라 국왕은 대서양 연안에 여러 항구를 건설하고 모스크, 학교, 함맘, 성벽 등을 건설하여 안파(Anfa, 카사블랑카) 지역에 활기를 불어넣었습니다. 카사블랑카 항구의 현대화와 인프라 구축은 1765년 에사우이라(Essaouira Mogador, 모가도르) 도시의 설립과 마찬가지로 술탄의 대외 개방 정책의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는 모로코의 대외 무역 대부분을 자신이 쉽게 통제할 수 있는 항구로 집중시키고자 했습니다. 모가도르만은 이상적인 장소로 보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현실화하기 위해 툴롱(Toulon) 출신의 프랑스인 건축가 프랑수아 코르누(François Cornut)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유럽의 주요 항구와 무역 노선을 신설하고 모로코의 국가 위상을 선전하는 것 이였습니다. 시디 모하메드 벤 압달라 국왕은 모로코에 현대적이고 경쟁력 있는 대규모 항구를 건설하고 싶었습니다. 이 와중에 유명한 건축가이자 도시 계획가인 프랑수아 코르누는 1766년 라라슈(Larache) 재난 당시 포로로 잡혀왔던 상태였습니다. 그는 400명의 기독교인 포로들의 도움으로 이 도시를 요새화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도시의 레이아웃은 유럽 모델을 기반으로 했습니다. 시디 모하메드 벤 압발라는 정치와 전략에 대한 천재적인 재능 외에도 알라윗 왕조의 위대한 건축가 중 한 명이었어요. 그는 마라케시에 큰 애정을 보였는데, 카스바 지역의 건설 및 재건 공사와 아그달 정원 및 다양한 성역을 복원하는 작업을 수행했습니다. 또한 알 아자르 또는 알 루아 모스크, 베르다인 및 베니마 모스크, 시디 모하메드 벤 아이사 및 시디 부 오스만의 영묘 등 메크네스에 수많은 종교 건축물을 건축했습니다. 라바트에서는 알 수나 모스크의 기초 공사가 시작되었고 왕궁이 지어졌습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페즈시는 진정한 르네상스를 맞이했습니다. 여러 모스크와 연설장이 지어졌습니다. 그는 부아나니야 모스크도 복원했습니다. 시디 모하메드 벤 압달라가 손대지 않은 주요 도시는 없는 거의 없고 흔적은 모로코 전역에 걸쳐서 남아있습니다. 177-1780년 사이에 가뭄(1776~1782년)과 전염병 대유행(1797~1800년)으로 인해 모로코는 인구학적 대재앙과 대대적인 인구 이동이 발생했습니다. 가장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이 25년 동안 모로코 인구의 절반이 사망했으며, 이로 인해 많은 마을이 지도에서 사라지고 전염병의 영향을 덜 받는 지역으로 이주하는 이들로 인해 사회적 전반에 걸쳐 큰 위기가 닥쳤습니다. 16세기 초 500만 명에 달하던 모로코의 인구는 300만 명 이하로 감소했습니다. 그러나 이 재앙은 자우이아족의 부활로 이어졌습니다. 1790년 시디 모하메드 벤 압달라가 사망하면서 모로코는 재건되었지만, 분열의 씨앗이 남아 자우이아족의 세력이 커졌습니다.
물레이 야지드의 (Moulay Yazid, 1790-1792) 통치시대
시디 모하메드(Sidi Mohammed)의 후계자로 지명된 물레이 야지드(Moulay Yazid)는 아버지에 대한 일련의 반란과 반란을 일으키며 모험적이고 때로는 스캔들을 일으키는 삶을 살았습니다. 물레이 야지드의 짧은 통치 기간은 모로코 남부에서 일어난 봉기, 마라케시에서 술탄으로 선포된 형제 중 한 명, 수스와 타필라렛에서 일어난 또 다른 형제들의 반란으로 특징지어집니다. 물레이 야지드는 엄청난 폭력과 잔인함으로 반응했습니다. 그는 약탈당한 마라케시를 탈환하고 반대세력을 학살했습니다. 그러나 그후 물레이 야지드는 전투에서 전사했습니다. 모로코는 1797년까지 분열된 상태로 위태로운 시기를 맞게 됩니다.
물레이 슬리메인의 통치(Moulay Slimane, 1792-1822)
시디 모하메드 벤 압달라 술탄의 아들인 물레이 슬리마네는 긴 통치 기간(30년) 초반에 모로코 남부 일부 지역에서 술탄으로 인정받은 물레이 히삼과 타필라렛의 또다른 영토에서 군림한 압데라흐마네라는 두 형제와 싸워야 했습니다. 그들에게 그의 승리한 이후에도 세 가지 새로운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1810년경에 발생한 산악 지역의 및 베르베르족 내란 위기(리프, 중부 및 북부 아틀라스, (Rif, Middle and High Atlas)), 자우이아(zaouias) 세력의 부활로 인한 종교적 위기, 마지막으로 앞선 두 위기가 종합된 왕권 위기가 그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물레이 슬리만은 특정 지역의 가문들(특히 Derkaoua와 Tijanya)과 손을 잡고 연합합니다. 리프 반란군은 1813 년경에 진압되었습니다. 베르베르족의 아이트 아타(Ait Atta) 부족은 1816년 타필라레(Tafilalet) 지역의 일부를 장악했습니다. 아틀라스 중부의 봉기는 이 지역의 모든 산하자(Sanhaja)와 제넷(Zenet) 부족이 아부 바크르 암하우치라는 아이트 시디 알리 지도자를 중심으로 단결한 가장 큰 봉기였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술탄에 대항하여 단결하고 젬무르(Zemmour) 세력과 합류했습니다. 1818년, 술탄의 군대는 이 연합군에 의해 패배했고, 물레이 슬리만은 포로로 잡혔으며 그의 아들 물레이 브라힘은 살해당했습니다. 나흘 간 포로로 잡혀 있는 동안 술탄은 이슬람 선지자(모하메드)의 후손으로서 반란군에 의해 풀려나기 전까지 존경받는 대우를 받았습니다. 이제 베르베르 산맥의 지배자가 된 암하우치(Amhaouch)는 1820년 페즈에 입성하여 술탄과 전쟁을 벌이고 있던 우에잔 세력의 지도자들을 만나서 동맹에 합의했습니다. 국제적인 측면에서 물레이 슬리만(Moulay Slimane)은 대외 무역이 감소한 1805년까지 시디 모하메드 벤 압달라(Sidi Mohammed ben Abdallah) 정책을 따랐습니다. 19세기 초, 이러한 경제적 쇠퇴는 모로코 빈곤의 큰 원인이며 그후 고립과 철수 정책이 시작되었습니다. 물레이 슬리만은 전임자들과 마찬가지로 종교 건축물의 건설과 복원에 착수했습니다. 페즈에서는 위대한 알-알시프 모스크인 밥 귀사(Bab Guissa) 성문과 메데르사(madrasa)를 세웠고, 위풍당당한 저택인 다르 물레이 슬리먼(Dar Moulay Slimane)의 건축을 맡기도 했습니다. 또한 페즈의 다르 알 마흐젠(dar al Makhzen)에서 요새에 성벽을 쌓는 일을 수행했습니다. 19세기 초, 라바트에는 알 쿠바(al-Qubba mosque) 모스크와 물레이 슬리만 모스크가 세워졌습니. 물레이 슬리메인의 통치 말기는 중앙 권력의 약화 현상이 특징입니다. 1822년 술탄은 내전에서 다시 패배했고 승리자인 자우이아 체라디야(zaouia cherradiya)은 그를 죽이지 않고 풀어주었습니다. 마라케시로 돌아온 물레이 슬리만은 이제 모든 명성을 잃었고 조카 중 한 명인 동생 물레이 히삼의 아들 물레이 압데라흐만 벤 히삼(Moulay Abderrahmne ben Hicham)을 후계자로 선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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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derrahmane(1822-1859) 왕 시가에서 모로코는 유럽 강국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모로코가 Emir Abd al-Qadir(알제리 독립 운동 지도자)을 지지하고 그의 망명을 받아주자 1844 년에 Isly의 전투에서 프랑스 군에 의해 공격받고 패배하여 Emir Abd al-Qadir지지를 포기했다.
Muhammad IV (1859-1873)와 Hassan I (1873-1894)의 통치 기간에 알라윗 왕조는 무엇보다도 유럽 국가와 미국과의 무역 관계를 장려했다. 베르베르 족과 사하라 베두인 부족에 대한 통제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프랑스 군대의 긴밀한 협조하에 모로코 군대 및 행정부 근대화에 착수했다. 모로코 북부를 정령하고 있었던 스페인과의 전쟁(1859-1860) 패배 후 서유럽 여러 나라들이 모로코 문제에 직접적으로 관여하기 시작했다. 마드리드 조약(1880)에서 모로코의 독립성이 보장되었지만, 프랑스는 더 큰 영향력을 얻었다. 이처럼 커져가는 영향력에 대응하기 위한 독일의 모로코 영향력 시도(1905-1906년)로 인해서 모로코는 첫 번째 위기와 1911년의 두 번째 모로코 위기를 초래했습니다. 1906년 스페인 남부 알헤스라스에서 열린 협상에서 서유럽 강대국들(영국-프랑스-스페인-독일) 간에 가까스로 외교적 타협을 보았다.
결국 모로코 국왕은 1912년 12월 3일에 페스(Fes)조약에 서명을 통해 프랑스 보호령을 인정해야만 했다. 동시에 북부 모로코의 Rif 지역은 스페인 지배하에 들어갔다.
모로코는 그후부터 프랑스의 지배하에 있다가 1956년 3월 2일에 드디어 독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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