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철학
7세기에 아랍의 예언자 마호메트가 창시한 종교.
이슬람에서 철학의 기원과 착상은 신학과 차이가 있다. 철학은 비종교적 학문 이론과 더불어 발전하는 데 비해 이슬람 신학은 엄밀한 의미에서 이슬람 공동체를 떠나서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은 그리스도교나 유대교 신학과 별개의 것이나 철학에서 이러한 부분은 있을 수 없다. 이슬람교도들의 철학적 관심은 9세기경 신학의 생성 단계에서 나타났다. 즉 그 기원은 그리스어·파흘리비어·산스크리트로 된 철학과 학술 서적이 9세기 중엽까지는 아랍어로 대량 번역된 데서 찾을 수 있다. 당시의 학문 분야는 자연과학·수학·형이상학·윤리학·정치학 등 광범위했다. 최초의 이슬람교도 철학자 알 킨디는 무타질라(mu⁽tazila)의 융성기인 9세기 전반에 바그다드에서 살았다. 그의 저서는 그가 인도의 수학과 그리스의 철학에 식견을 갖추었음을 보여주지만,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저서와는 친숙하지 못한 것 같고, 또 접근방법도 미숙한 것처럼 보였다. 알 라지는 9~10세기에 무타질라의 원자론을 받아들여 창조된 세계에 만연되어 있는 불완전성과 악의 책임을 절대신에게 돌리지 않고 합리적으로 옹호할 수 있는 창조론의 발전에 전념했다. 결국 알 킨디와 알 라지는 철학과 이슬람을 갈라놓고 있는 간격을 좁히지 못했다. 이 간격을 메우는 데 공헌한 이가 알 파라비(9~10세기)이다. 그는 철학을 이슬람의 틀에 맞게 다시 짜서 이 철학적 틀에 따라 논리학·물리학·수학·형이상학 및 정치학을 체계화시켰다. 특히 정치학의 연구 대상은 행복의 탐구와 공동체에서 행복의 실현에 두었다.
11세기초에 크게 활약한 철학자 이븐 시나는 알 파라비의 저서에서 몇 가지 영감을 받았다. 즉 창조·형태·영혼불멸에 관한 플라톤의 가르침이 아리스토텔레스의 교설보다 계시 종교의 교의에 더 가깝고, 또 플라티누스를 비롯한 신플라톤 학파의 교의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성적 견해와 계시 종교를 조화시킬 수 있으며 나아가서 철학은 창조나 내세의 보답과 응징의 문제에는 종교의 가르침에 반드시 순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내세는 인간 영혼의 불멸을 전제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존재의 문제에 파고들어 본질과 실존을 구분했다. 즉 실존한다는 사실은 실존물의 본질에서 추론 또는 설명될 수 없으며, 형식과 질료는 그 자체가 우주의 움직임이나 실존물의 점진적 실현에 상호작용·반작용하지 못하며 그 기원일 수 없다고 논했다. 따라서 실존은 동인(動因 agent-cause)의 덕을 입어 본질에 추가 또는 부가되는 것이다. 즉 원인이 곧 실존 개물이며 또 그 결과와 병존한다는 것이다.
스페인의 안달루시아와 북서 아프리카에서는 12세기 전까지 이슬람 신학과 철학, 물리학과 형이상학에 대한 일반적 관심은 소홀한 반면 의학·약물학·수학·천문학·논리학 등에 대한 관심은 컸다. 그러나 12세기에 들어와서 파라비, 이븐 시나, 가잘리의 저작이 알려지면서 철학도 발달했다. 서부 이슬람 철학은 이븐 밧자, 이븐 투파일을 거쳐 이븐 루슈드에 이르러 그 꽃을 피우게 되었다. 이븐 투파일보다 젊은 이븐 루슈드는 철학과 이슬람 공동체의 관계 정립에 뛰어났다. 그는 공동체 구성원 모두의 행복추구가 이슬람 율법의 뜻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누구든지 이슬람 신조를 믿고 그에 따라 행동해야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지혜의 으뜸인 철학을 추구할 수 있는 사람은 몇 안 되는데, 그들은 자신들이 추구한 결혼을 신학자들이 올바르다고 주장하는 법 해석에 맞출 필요가 없다고 그는 논했다. 즉 신법 자체가 철학자에게 직접 그 해석을 최선의 방법으로 추구하도록 그 권위를 위임했기 때문에 신학자는 이에 관여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그의 저서 〈철학과 부조리〉는 가잘리에 대한 비판으로 유명하다. 그는 중세와 르네상스 시기의 유럽 사상에 영향을 끼쳤다.
한국 브리태니커 온라인
7세기에 아랍의 예언자 마호메트가 창시한 종교.
이슬람에서 철학의 기원과 착상은 신학과 차이가 있다. 철학은 비종교적 학문 이론과 더불어 발전하는 데 비해 이슬람 신학은 엄밀한 의미에서 이슬람 공동체를 떠나서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은 그리스도교나 유대교 신학과 별개의 것이나 철학에서 이러한 부분은 있을 수 없다. 이슬람교도들의 철학적 관심은 9세기경 신학의 생성 단계에서 나타났다. 즉 그 기원은 그리스어·파흘리비어·산스크리트로 된 철학과 학술 서적이 9세기 중엽까지는 아랍어로 대량 번역된 데서 찾을 수 있다. 당시의 학문 분야는 자연과학·수학·형이상학·윤리학·정치학 등 광범위했다. 최초의 이슬람교도 철학자 알 킨디는 무타질라(mu⁽tazila)의 융성기인 9세기 전반에 바그다드에서 살았다. 그의 저서는 그가 인도의 수학과 그리스의 철학에 식견을 갖추었음을 보여주지만,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저서와는 친숙하지 못한 것 같고, 또 접근방법도 미숙한 것처럼 보였다. 알 라지는 9~10세기에 무타질라의 원자론을 받아들여 창조된 세계에 만연되어 있는 불완전성과 악의 책임을 절대신에게 돌리지 않고 합리적으로 옹호할 수 있는 창조론의 발전에 전념했다. 결국 알 킨디와 알 라지는 철학과 이슬람을 갈라놓고 있는 간격을 좁히지 못했다. 이 간격을 메우는 데 공헌한 이가 알 파라비(9~10세기)이다. 그는 철학을 이슬람의 틀에 맞게 다시 짜서 이 철학적 틀에 따라 논리학·물리학·수학·형이상학 및 정치학을 체계화시켰다. 특히 정치학의 연구 대상은 행복의 탐구와 공동체에서 행복의 실현에 두었다.
11세기초에 크게 활약한 철학자 이븐 시나는 알 파라비의 저서에서 몇 가지 영감을 받았다. 즉 창조·형태·영혼불멸에 관한 플라톤의 가르침이 아리스토텔레스의 교설보다 계시 종교의 교의에 더 가깝고, 또 플라티누스를 비롯한 신플라톤 학파의 교의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성적 견해와 계시 종교를 조화시킬 수 있으며 나아가서 철학은 창조나 내세의 보답과 응징의 문제에는 종교의 가르침에 반드시 순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내세는 인간 영혼의 불멸을 전제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존재의 문제에 파고들어 본질과 실존을 구분했다. 즉 실존한다는 사실은 실존물의 본질에서 추론 또는 설명될 수 없으며, 형식과 질료는 그 자체가 우주의 움직임이나 실존물의 점진적 실현에 상호작용·반작용하지 못하며 그 기원일 수 없다고 논했다. 따라서 실존은 동인(動因 agent-cause)의 덕을 입어 본질에 추가 또는 부가되는 것이다. 즉 원인이 곧 실존 개물이며 또 그 결과와 병존한다는 것이다.
스페인의 안달루시아와 북서 아프리카에서는 12세기 전까지 이슬람 신학과 철학, 물리학과 형이상학에 대한 일반적 관심은 소홀한 반면 의학·약물학·수학·천문학·논리학 등에 대한 관심은 컸다. 그러나 12세기에 들어와서 파라비, 이븐 시나, 가잘리의 저작이 알려지면서 철학도 발달했다. 서부 이슬람 철학은 이븐 밧자, 이븐 투파일을 거쳐 이븐 루슈드에 이르러 그 꽃을 피우게 되었다. 이븐 투파일보다 젊은 이븐 루슈드는 철학과 이슬람 공동체의 관계 정립에 뛰어났다. 그는 공동체 구성원 모두의 행복추구가 이슬람 율법의 뜻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누구든지 이슬람 신조를 믿고 그에 따라 행동해야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지혜의 으뜸인 철학을 추구할 수 있는 사람은 몇 안 되는데, 그들은 자신들이 추구한 결혼을 신학자들이 올바르다고 주장하는 법 해석에 맞출 필요가 없다고 그는 논했다. 즉 신법 자체가 철학자에게 직접 그 해석을 최선의 방법으로 추구하도록 그 권위를 위임했기 때문에 신학자는 이에 관여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그의 저서 〈철학과 부조리〉는 가잘리에 대한 비판으로 유명하다. 그는 중세와 르네상스 시기의 유럽 사상에 영향을 끼쳤다.
한국 브리태니커 온라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