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세계의 문화와 법
1. 왜 지금 이슬람인가?
가. 테러를 보는 두 개의 다른 생각
국제적 대미 극렬 저항조직인 알카에다, 레바논 남부의 저항 조직 헤지불라, 팔레스타인의 하마스와 이슬람 지하드 등은 테러조직인가? 저항조직인가? 테러의 국제적 기준은 존재하며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가? 저항적 테러와 국가 테러 사이에 정당성의 차이를 어떻게 인정할 것인가? 아랍에서는 알카에다를 테러조직으로 보는 반면 헤지불라와 하마스는 저항 정치조직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나. 이중 잣대(Double Standards)
핵 기술 보유, 유엔안보리 결의안의 선택적 준수 강요,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과 2006년 7월 이스라엘의 레바논 전격 침공을 바라보는 시각의 큰 차이가 결국 중동문제 해결을 위한 가장 큰 걸림돌이다.
다. 중동에서 부는 한류열풍과 KOREA 브랜드
지금 이집트 수도 카이로에서는 한류바람이 한참이다. 지난 연말 “겨울연가”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방영 되었는데, 그 감흥을 이기지 못 한 시청자들의 빗발같은 성화로 “겨울연가”가 종영된지 2주만에 재방송을 시작했다고 한다. 지금 이 시각에는 “대장금”이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다고 한다.
드디어 사하라 사막에도 한류의 열풍이 거센 모래바람을 몰아내고 있다. 왜 이슬람사회에서 특히 아랍인들은 한국 드라마에 열광할까? 중동-아랍사람들은 1970년대 이후 우리 건설 근로자들의 성실과 근면성을 신화처럼 기억하고 있다. 대학과 관공서, 고속도로와 발전소 등 한국 기업들이 이룬 국가적 상징물들을 보면서 오늘도 그들은 한국을 기억하고 있다. 더 나아가 한국산 전자제품과 휴대폰 자동차들을 오히려 일본제품을 앞질러 선호하는 경향이 나날이 확산되고 있다. 24시간 한국제품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지독한 한국 사랑이다.
라. 중동의 비중과 중요성
9.11 테러 이후 지구촌의 초점은 온통 중동과 이슬람이다. 이라크 전쟁으로 한국군이 파병 됨으로써 우리의 관심도 중동으로 쏠리고 이슬람에 관심도 크게 늘어났다. 따지고 보면 지금도 원유의 70%(에너지 자원의 90%) 가까이를 중동에서 들여오고, 중동 특수를 원동력으로 우리가 1970년대 100억불 수출과 국민소득 1,000불 시대라는 대망의 꿈을 이루지 않았는가? 오늘날의 우리 경제가 자리를 잡는 계기가 중동이었다.
한국의 해외건설 플랜트 수주의 부동의 제1위 지역이고, 60%를 넘는 가전시장을 한국제품이 석권하는 상품수출시장이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아무런 적대적 이해관계를 갖지 않았다.
마. 오해와 편견의 당사자
그럼에도 그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어떤가? 우리의 뇌리 속에 중동과 그들의 문화인 이슬람에 대해서는 온통 부정적인 이미지만 가득하다.
그들 뒤에는 야만, 미개, 전근대적, 호전이란 단어들이 따라 다닌다. 사실 순수하고 의리를 존중하는 그들은 처음 만난 사람에게도 빵과 잠자리를 건네는 사람들이다. 내일 당장 먹을 것이 없어도 오늘 찾아 온 손님을 그냥 돌려 보내는 법이 없다. “공동체에 한 톨의 양식이라도 남아있는 한 굶주리는 자가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그들의 삶의 철학이고 공동체 정신이다. 이처럼 오아시스에는 물과 나눔이 넘친다. 호전적이고 약육강식의 법칙 밖에 모른다는 서구중심의 이슬람과 아랍인 묘사는 사실과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왜 이슬람과 아랍은 우리에게 온통 부정적이야 할까? 우리의 시각과 시선으로 중동 지역과 이슬람 문화를 들여다 볼 기회와 채널이 없었기 때문이다. 신문 외신 란에 실리는 자살 폭탄테러, 전쟁, 갈등, 분쟁이란 단어로만 그들을 보고 그들의 진정한 삶의 모습과 고민의 언저리들을 들여다 볼 창이 없었다는 뜻이다. 더욱 심각한 왜곡은 중동과 이슬람의 문제를 온통 적대적 이해당사자인 미국과 유대중심의 언론 과 관점으로 보아왔다는 점이다. 지난 50년간 객관과 공정보도라는 허울에 빠져 체계적이고 구조적으로 양산된 지적 편중이 우리를 인식의 식민상태에 놓이게 한 것이다. 이런 왜곡 현상은 너무나 팽배해 있어 적어도 균형감각을 갖게 될 때까지만 해도 한 세대는 더 기다려야 될지도 모른다. 그 결과 한국사회의 내노라 하는 지식인들조 차도 “아랍=이슬람” 등식 속에서 무엇이 아랍의 전통이고 악습인지, 무엇이 이슬람의 진정한 가르침인지 거의 구분하지 못한다. 일부다처, 근친 결혼, 여권탄압, 침략과 호전성 같은 것들은 이슬람과 거리가 먼 유목사회의 관습임에도 모두가 이슬람과 관련지어 생각한다.
2. 이슬람의 분포
현재 이슬람을 믿는 인구는 14억에 이른다. 이슬람 국가로 유엔에 가입하고 있는 나라만도 57개국에 이른다. 지구촌 4분의 1에 육박하는 세계최대 단일 문화권이다. 그런데 이슬람 세계에서 아랍권이 차지하는 비중은 인구와 분포에서 전체의 25% 정도이다. 나머지 대부분의 이슬람은 아시아에 집중되어 있다. 세계 최대 이슬람 국가가 인도네시아이고 무슬림 인구수로 두 번째 나라가 1억 8천만의 인도이다.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는 물론 중앙아시아 전역도 이슬람권이다. 8세기 이미 이슬람화된 이후 오늘날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기즈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타지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아제르바인잔 등이 모두 약 2억의 인구를 갖고있는 이슬람 국가다. 동남아에서는 말레이시아, 부르나이는 물론 불교 국가인 태국에도 4백만, 가톨릭 국가인 필리핀에도 5백만의 무슬림들이 단단한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다. 중국에도 5천만에서 1억 정도의 무슬림들이 분포해 있다고 한다. 이렇게 보면 이슬람은 우리와 이웃한 아시아의 종교가 아닌가.
3. 이슬람의 태동과 성장
이슬람교는 610년 아라비아의 심장부 메카에서 한 평범한 인간인 무함마드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완성한 종교이다. 이슬람교는 흔히 回 敎. 回回敎 또는 마호멧교 등으로도 지칭되고 있다. 그러나, 회교, 회회교는 중국이 이슬람교를 위구르인들을 통해 받아들이게 됨으로써 위구르(回紇, 回鶻)의 종교라는 의미에서 유래되었고, 무함마드교는 예수를 믿는 예수교(기독교), 부처를 믿는 불교라는 개념의 연장선에서 무함마드를 믿는 종교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슬람은 유일신 하나님(아랍어로 알라)을 믿는 종교이다. 무함마드는 하나님의 계시를 꾸란(코란)이란 형태로 인류사회에 전달한 마지막 예언자이고, 한줌 신성(神性)도 갖지 아니한 완전한 인격체에 불과하다. 따라서 회교나 무함마드교라는 용어는 이슬람교의 본질에 비추어 부적절한 표현이다.
가. 무함마드의 등장과 이슬람교의 성립
5세기말 6세기초 중동-오리엔트 사회는 비잔틴과 사산조 페르시아라는 양대 초강 세력이 대치하고 있었다. 두 제국은 오랜 전쟁으로 국력이 쇄진하였고, 인근 복속민족들에 대한 가혹한 수탈로 정치적 불안이 고조되었다. 비잔틴과 사산조 페르시아 양 제국이 오랜 전쟁으로 지쳐있을 때, 이슬람교가 메카의 명문 꾸라이쉬 (Quraish) 가문의 무함마드에 의해 완성되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다. 570년경 유복자로 태어난 무함마드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고,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자립과 독립심이 남달리 강했던 사막의 아들이었다. 시리아와 예멘을 잇는 대상활동에 참가한 그는 당시 중동전 역에 만연해 있던 타락한 사회상에 깊이 고뇌하였다. 긴 명상에 들어간 무함마드는 40세 되는 해인 610년 드디어 가브리엘 천사의 인도로 신의 계시를 받게 된다. 이 계시는 점하나 획 하나 틀리지 않고 꾸란이란 형태로 집대성되었다.
이슬람은 우상숭배타파, 평등과 평화를 표방 하는 철저한 일원적 유일신 사상을 강조하면서, 새로운 입지를 마련해 갔다. 아담에서 아브라함, 모세, 예수로 이어지는 성경상의 많은 선지자들은 시대적 임무를 띤 훌륭한 인간 예언자로 인정되고 추앙되었다. 무함마드는 예수 이후에 신에 의해 보내진 마지막 예언자로서 앞선 복음의 부정을 위해서가 아니라, 변질된 신의 진리와 곡해된 말씀을 바로잡고 완성하는 사명을 가졌다고 보았다.
따라서 꾸란은 모세오경, 시편, 복음서 등 앞선 경전들의 내용을 순화, 보완해 주거나 확증해 주는 최후의 경전이 되기 때문에, 이 땅에서의 종교는 이슬람으로 완성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한 줌의 신성도 갖지 않는 최고의 인격체로서의 예언자관과 신과 인간의 직접 교통, 계급과 인종, 피부색을 초월한 만민의 평등과 구체적 형제애 의식이야말로 하층민을 파고든 이슬람의 차별성이고 강점이었다.
그러나, 무함마드의 보편적 종교사상은 당시 우상숭배자들인 기득 상류층의 종교적 권위와 상업적 질서를 위협하였기 때문에 메카에서 극심한 배척을 당하였다. 결국 유대인의 협력과 도움으로 메니다로 이주해 갔고(헤지라), 메카와 몇 차례 전투에서 기적적인 승리를 거둠으로써 초기 이슬람 국가의 급속한 발전을 가능케 해주었다. 무함마드는 메카인에 대한 정치적 보복을 자제하고 주변의 수많은 부족들과 우호조약을 체결하여 그들을 이슬람사회의 범주로 끌어들이는데 성공하였고, 이러한 방식은 후일 이슬람 정복시기의 기본정책으로 기능했다.
단시일내에 정복사업이 성공할 수 있었던 내적 요인은 당시 침체된 아라비아 일대의 상업과 목축업으로는 늘어나는 이슬람 공동체의 생존에 충분치 못했으므로 이주지와 비옥한 경작지의 획득, 공납지의 확대, 안정된 교역로의 확보 등이 절실히 요구 되었기 때문이었다. 외적인 요인으로는 비잔틴과 페르시아 제국의 끊임없는 교전으로 인한 피폐, 양 제국의 강압적인 통제 정책과 과중한 조세수탈로 인해 민심의 이반 등을 들 수 있다.
한편 이슬람교가 철저한 일신교로서 참신앙에 대한 긍지가 강했고, 새정복지에서 살륙과 직접 통치 보다는 공납과 간접통치를 선호함으로써 무혈의 정복사업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4. 중세 이슬람의 번영과 쇠퇴
이슬람 세계는 압바스 시대(751~1258) 500년 간 전성기를 맞았다. 이 시기에 비아랍인들의 아랍화가 활발히 추진되어, 아랍, 시리아, 페르시아적 요소들이 골고루 융합된 보다 폭넓은 이슬람 문화가 발전하였다. 압바스 제국은 5대 칼리프 하룬 알-라쉬드(Harun al-Rashid,786~809) 와 그의 아들 마문(Mamun,813~832)시대에 번성기를 맞이하였다. 이때 바그다드는 당의 장안과 함께 세계교역과 문화의 중심지로서 번성하였고, 활발한 육해상 실크로드의 개척으로 동서문 물이 물밀듯이 유입되었다. 특히 중국으로부터의 제지술의 도입은 종이혁명을 가져와 그리스로마의 고전이 번역, 재해석되고, 학문이 꽃을 피어 이슬람의 르네상스를 맞이하였다. 유럽이 암흑의 질곡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중세의 이슬람세계는 세계 최고의 문명을 자랑하는 가장 찬란한 시대를 살았다. 당시 세계에 이슬람 세계만큼 광범위하고 통일된 정치체제와 문화의 통일성을 가진 문화권은 없었다. 그리스-로마의 학문을 보존하여 유럽에 전해 준 아랍세계의 문화적 교량역할이 유럽의 르네상스를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었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그리고 중세 아랍의 학문과 세계문화는 지금도 우리의 주변에서 간접적인 영향을 발휘하고 있다. 천문학(astronomy), 점성학(astrology), 화학(chemistry), 연금술(alchemy), 대수학 (algebra), 연산학(algorism) 같은 학술용어는 물론 알칼리, 알코올, 설탕(sugar), 레몬, 커피, 음악(music), 시럽, 자스민, 파자마 같은 생활 용어가 아랍어에서 파생 되었거나 아랍세계에 의해 세계에 전파 되었다는 사실이다.
5. 이슬람 중세의 마감과 근대화
세계 최고에 자만하던 중세의 이슬람은 14세기 오스만제국으로 이어졌고, 1683년 비엔나 전투에서 오스만 터키가 패배 함으로써 마침내 유럽의 대반격이 시작되었다. 이슬람 세계가 아직도 정신적인 가치의 우월감에 사로잡혀 있을 때, 유럽은 자본주의와 합리주의를 바탕으로 새로운 물질문명의 틀을 구축해 나갔다. 그러는 사이 이슬람 세계는 과학과 군사면에서 발전하는 유럽과의 간격이 점점 벌어져갔다. 결국 18세기 이후 자기 혁신에 실패한 이슬람 세계는 산업화에 성공한 유럽에 점점 뒤쳐지기 시작했다. 특히 유럽의 신무기 개발과 국제무역 에서의 주도권 확보는 유럽과 이슬람 세계간의 종전의 위상을 근원적으로 뒤바꾸어 놓았다. 유럽과 다른 아시아 국가들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한 군비증강과 크고 작은 전쟁비용에 오스만 제국의 경제는 급격히 쇠락하였다. 인플레이션과 계속된 가격상승은 일반 대중들의 삶을 뿌리째 흔들어 놓았고, 대항해 시대와 함께 대서양에서 아프리카 남단을 거쳐 인도양에 이르는 새로운 항로를 개척한 유럽의 대외무역 독점으로 중동 지역이 누려왔던 중계무역의 경제적 이익이 심각하게 침탈 당했다. 무역 불균형의 심화로 금과 은의 유출도 극심했다. 무엇보다 기술력의 부족으로 인한 농업생산의 감소와 조선술과 무기체계에서의 중동의 열세는 국력의 걷잡을 수 없는 쇠퇴를 가속화시켰다.
6. 오해받는 이슬람
가. 한 손에 꾸란, 한 손에 칼
일찍이 서구인들이 이슬람인들에 의한 단시일의 정복사업을 소위 “한 손에 꾸란, 한 손에 칼” 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이슬람의 호전성과 강제전파를 설명하였다. 그러나 이는 그들의 이교도에 대한 적개심과 확산되는 이슬람 세력에 대한 위기감에서 만들어진 용어에 불과하다. 오히려 개종하게 되면 인두세나 토지세 등의 일부가 면제 되었음으로 정부는 국가수입의 증대를 위해 피정복민의 개종 보다는 공납을 요구하였다. 또한 공납의 액수도 비잔틴이나 페르시아의 수탈에 비하면 가벼운 것이었음으로 이슬람 제국하에서 그리스도교인 유대교도들은 상당한 종교의 자유와 경제적 기득권을 향유하고 있었다. 불행히도 아무런 역사적 근거도 없는 “한 손 에 꾸란, 한 손에 칼” 이란 용어가 교과서에서 삭제될 때까지 우리는 1세기를 기다려야 했다. 이 용어는 지난 1세기 동안 서구인은 물론 한국 인의 이슬람에 대한 인식세계를 지배하던 망령이었다.
나. 일부다처 문제
일부다처는 부인을 넷까지 거느린다는데, 그게 현대생활에 맞는 것이냐? 너무 남성 위주의 종교가 아닌가? 이슬람의 기본 결혼제도는 일부일처이다. 다만 전쟁과 기근과 같은 특수한 상황에서 다처의 문을 열어놓고 있다는 점이다.
“만일 너희가 고아들을 공평하게 대해줄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이 있다면, 결혼을 할 것이니, 너희가 마음에 드는 여인으로 둘, 셋, 넷을 취할 것이다. 그러나 그녀들을 공평하게 대해 줄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이 생긴다면 한 여인으로 족하니라…”(꾸란 4;3)
초기의 일부다처는 인도적인 입장에서 여성들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로 출발한 것이 분명하다. 무함마드가 메카인과의 세 차례에 걸친 치열한 전투 끝에 많은 동료들을 잃고 메니나를 이끌어나갈 때, 고아와 미망인의 문제는 심각하였다. 일부다처 계시가 그런 상황에서 메디나에서 주어진다는 사실이 이런 사정을 말해준다. 교역과 목축이 주가되는 사회체제에서 여자가 고아들을 데리고 혼자 살아간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였다. 다처허용 계시가 나온 배경은 극 한적인 상황에서도 자기만 살지 않고 동료나 친구들의 가족을 함께 부양한다는 지극히 인도적인 결정이었다. 문제는 일부 현대 무슬림들이 자신의 사회적인 신분을 과시하는 수단이나 성 적욕구를 충족하는 수단으로 다처제도를 악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슬람은 일부일처가 원칙이다. 그리고 오늘날 일부국가에 국한 되기는 하나 다처를 하는 사람들은 전체인구의 5% 미만이 다. 현재는 많은 이슬람국가에서 일부다처를 법으로 금지하는 추세가 확산되고 있다. 일부다처를 하더라도 그것은 축첩의 개념이 아니고, 4명의 아내가 모두 정실 부인이다. 네 아내의 상속지분은 동일하고 사회적 편견이나 차별도 없다. 그리고 네 아내의 자식들도 모두 적자로 하는 등의 법적, 사회적 차별이 없다.
다. 차도르, 여성할례와 여성억압 기제
이슬람의 차도르는 정숙함의 상징이다. 외간 남자들을 자극하여 정숙함을 잃지 말라는 꾸란의 가르침에 근거한다. 따라서 얼굴까지 가리고 남성과 눈길을 주고받았다고 해서 공개적인 처벌을 받는 극단적이 일부 이슬람사회의 행태는 이슬람의 본질적인 가르침에 근거하지 못한다. 여성할례는 이슬람의 가르침과 관련 없는 아랍의 토착적 관습이다. 남성할례가 하나님 앞에서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한다는 가르침에 비추어 신체의 가장 더러워지기 쉬운 부분을 정화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지만, 여성할례는 그러한 의미를 주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슬람의 기본 성격은 남녀의 역할이 혼동되는 것이 아니라 남녀가 뚜렷이 구별되는 사회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꾸란에서는 남녀 동등의 가치가 중요시되고 강조되고 있지만, 이 동등이 남녀 간의 동일체나 나아가서 외적가치의 균등까지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여성차별의 개념이 아니고 여성유별의 개념인 셈이다. 이런 면에서 이슬람사회는 남녀사이의 외적, 정서적, 지적 차이가 없다면, 사회에서의 그들의 역할과 기능에 있어서도 당연히 차이가 없어야 된다는 서구사회의 인식을 단호히 부정한다. 이런 면에서 이슬람 사회는 남녀의 역할분담과 상호보완, 기능의 분화를 인정하는 셈이다. 즉, 노동의 문제에서 남성에게는 보다 많은 경제적 책임을 부과하는 반면(꾸란 2:233,240,241/ 4:34 참조), 여성에게는 자녀의 양육과 보호에 더 많은 기여를 요구한다(꾸란 2:233, 7:189). 유산분배에 있어서 경제적 책임을 갖는 남성에게 여성보다 더 많은 상속을 인정한다.
동시에 여성에게는 가정경제 와 자녀양육, 가족의 정서적 조화와 복리에 더 많은 역할과 권리가 주어진다. 이런 측면을 이해하면 여성 차별 조항으로 자주 거론되는 꾸란의 몇몇 구절은 재해석 되어야한다. 즉 코란 2장 228절의 “남자는 여자의 상위에 있다”는 표현이나, 꾸란 4장 34절의 “남자는 힘이 강하여 여자 의 보호자가 된다”는 표현, 그리고 상속에서 남녀 간의 배분율을 2:1로 하는 조항(꾸란 4:11) 등 은 남성우월주의 보다는 이슬람사회의 남녀역 할과 기능분담의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다만 1,400년 전 이슬람의 여성관은 분명 여권혁 명을 의미하는 인류역사상 가장 놀라운 변화임에도 현재적 서구 관점과 획일화된 가치관으로 바라보는 이슬람권 여성은 일반적으로 남성에 비해 열등하고 차별화 존재로 각인되어 있다. 이는 1차적으로 코란의 재해석과 현실 문제와의 절충이 다른 종교들 보다는 그 폭이나 수용방식에서 매우 제한적인데 기인한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이것은 이슬람 종교의 문제라기 보다는 이슬람 국가가 처해 있는 사회적 구조와 관습, 민도, 여성의 교육정도 등과 밀접하게 관련된 문제이다. 무엇보다 여성의 지위와 관련 하여 여성내부의 인식의 다양성과 복합성, 차별 의식조차 갖지 못하는 여성자체의 문제인식 정도도 매우 중요한 요인이다. 그것은 같은 이슬람 국가라도 여성 수상을 배출하고 여성의 정치․사회적 참여가 서구 유럽 국가들 보다도 오히려 앞서고 있는 터키 같은 나라가 있는 반면에, 아직도 여성을 매질하고 남성중심 사회의 노예처럼 부리는 이슬람 사회도 엄연히 상존한다. 또는 여성의 운전 허용이 뜨거운 감자로 사회적 이슈가 되는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나라도 있다.
결론적으로 이슬람 법의 해석이 가부장적 사회제도와 부계중심 구조에 근거하고 있는 한, 아내와 딸 어머니로서 여성의 지위는 남성에 비해 열등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이슬람 사회의 현실이다. 그러나 코란에서는 분명하고 단호하게 여성을 현대사회에서 차별하도록 하는 어떤 제약이나 금기를 두고 있지 않다. 이런 점이 지금 대부분의 이슬람 사회에서 인식되어 여성의 사회진출과 정치참여, 사회 전부분에서 여성의 놀라운 약진을 가져다주고 있다. 비록 여성에 대한 인식의 변화나 여성 스스로의 변화가 아직은 서구적 기준에서 보면 매우 느리고 미진한 수준이지만, 그 변화의 속도 또한 그 문화권 사람들이 결정해야 한다. 사회에 대한 기여와 여 성능력의 발휘라는 구호아래 가정을 뛰쳐나간 그 공백을 이슬람사회는 아직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고, 건강한 가정과 자녀들의 교육이야말로 더욱 의미있는 사회적 기여라는 공감대가 아직은 강하게 작용한다. 결국 여성의 사회 진출과 자질의 발산에 대한 가치관은 문화권에 따라 서로 다르게 적용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선악과 우열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이고 가치관의 차이일 수 있기 때문이다.
7. 샤리아(Shariah)라고 불리는 이슬람 법
1) 샤리아의 어원 : 올바른 길
2) 법과 종교의 연결 :
이슬람은 정교 일치적 특징을 가진다. 종교가 삶과 유리되어 관념적 도덕 체제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삶속에서 녹아 모든 행위 하나 하나에 깊숙이 간여한다. 따라서 이슬람 법의 모든 해석도 예배, 단식, 순례, 세정의식, 금기 같은 종교적 의무나 숭배행위로부터 출발한다. 법을 변화하는 사회의 필요성과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한 인간의 지혜나 이성의 산물로 본 것이 아니라, 성스러운 영감을 가진 불변의 진리로 생각되었다.
샤리아는 사회의 최고 상위법으로 자리 잡았고, 법의 위반은 단순히 사회질서의 규범을 침해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종교적 불복종 행위로 간주된다.
①인간의 영적 생활에 부과된 법적 의무(신과 인간의 관계-종교적 계율) → 오주(예배, 신앙의 고백, 단식, 순례, 희사(자카트) 등
②인간의 외적 활동에 부과된 제한적 규범(인 간과 인간의 관계) → 개인의 지위, 결혼, 이혼, 상속, 재산권, 상업활동, 형벌
이슬람 법에서는 민사, 형사, 기타 법의 뚜렷한 독자적 구분 보다는 서로 혼재되고 상호유기적으로 작용한다.
3) 샤리아(성법)의 원천
①꾸란
②하디스
③키야스(유추)
④이즈마(합의) 샤리아는 성문법으로 수립되지 못했다.
4)법적인 허용과 제한
①신자들의 의무행위(꼭 지켜야 되는 것)
②의무는 아니지만(권장행위)
③대수롭지 않는 행위
④(금지된 것은 아니지만)바람직하지 않는 행위
⑤금지된 행위 윤리적인 것이 법에도 깊숙이 간여한다.
5) 샤리아 학파
①하나피 학파-서아시아 이집트 남부 터키 중앙아시아 파키스탄
②샤피학파-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③말리키 학파-북서아프리카 이집트 북부
④한발리 학파-이라크 시리아 사우디 아라비아(와하비)
6) 샤리아 법 해석의 위계 구도
①쉐이크 알 이슬람
②무푸티
③카디 파트와Fatwa(종교적 유권해석)
7)오늘날 이슬람 사회에서의 샤리아 위치
거의 대부분의 이슬람 사회에서 샤리아는 이미 폐기처분되거나, 고유한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남아있는 경우에도 구체적인 실정법으로서의 기능보다는 상속과 결혼, 작명 등 관습법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세속법(Qanun)이 점차 확산되고 잇는 추세다. 가장 엄격히 샤리아가 적용되고 있는 나라가 사우디 아라비아, 이란, 수단, 붕괴직전의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 정도이고, 걸프 지역 아랍국가들은 상징적으로 존치시키고 있다.
같은 이슬람 국가라도 터키 같은 곳에서는 오히려 샤리아가 금지되어 있으며, 사형제와 간통제까지 최근 폐지하였다.
<이 희 수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중동학회 회장 >
-제60회 변호사연수회/강좌1-
1. 왜 지금 이슬람인가?
가. 테러를 보는 두 개의 다른 생각
국제적 대미 극렬 저항조직인 알카에다, 레바논 남부의 저항 조직 헤지불라, 팔레스타인의 하마스와 이슬람 지하드 등은 테러조직인가? 저항조직인가? 테러의 국제적 기준은 존재하며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가? 저항적 테러와 국가 테러 사이에 정당성의 차이를 어떻게 인정할 것인가? 아랍에서는 알카에다를 테러조직으로 보는 반면 헤지불라와 하마스는 저항 정치조직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나. 이중 잣대(Double Standards)
핵 기술 보유, 유엔안보리 결의안의 선택적 준수 강요,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과 2006년 7월 이스라엘의 레바논 전격 침공을 바라보는 시각의 큰 차이가 결국 중동문제 해결을 위한 가장 큰 걸림돌이다.
다. 중동에서 부는 한류열풍과 KOREA 브랜드
지금 이집트 수도 카이로에서는 한류바람이 한참이다. 지난 연말 “겨울연가”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방영 되었는데, 그 감흥을 이기지 못 한 시청자들의 빗발같은 성화로 “겨울연가”가 종영된지 2주만에 재방송을 시작했다고 한다. 지금 이 시각에는 “대장금”이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다고 한다.
드디어 사하라 사막에도 한류의 열풍이 거센 모래바람을 몰아내고 있다. 왜 이슬람사회에서 특히 아랍인들은 한국 드라마에 열광할까? 중동-아랍사람들은 1970년대 이후 우리 건설 근로자들의 성실과 근면성을 신화처럼 기억하고 있다. 대학과 관공서, 고속도로와 발전소 등 한국 기업들이 이룬 국가적 상징물들을 보면서 오늘도 그들은 한국을 기억하고 있다. 더 나아가 한국산 전자제품과 휴대폰 자동차들을 오히려 일본제품을 앞질러 선호하는 경향이 나날이 확산되고 있다. 24시간 한국제품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지독한 한국 사랑이다.
라. 중동의 비중과 중요성
9.11 테러 이후 지구촌의 초점은 온통 중동과 이슬람이다. 이라크 전쟁으로 한국군이 파병 됨으로써 우리의 관심도 중동으로 쏠리고 이슬람에 관심도 크게 늘어났다. 따지고 보면 지금도 원유의 70%(에너지 자원의 90%) 가까이를 중동에서 들여오고, 중동 특수를 원동력으로 우리가 1970년대 100억불 수출과 국민소득 1,000불 시대라는 대망의 꿈을 이루지 않았는가? 오늘날의 우리 경제가 자리를 잡는 계기가 중동이었다.
한국의 해외건설 플랜트 수주의 부동의 제1위 지역이고, 60%를 넘는 가전시장을 한국제품이 석권하는 상품수출시장이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아무런 적대적 이해관계를 갖지 않았다.
마. 오해와 편견의 당사자
그럼에도 그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어떤가? 우리의 뇌리 속에 중동과 그들의 문화인 이슬람에 대해서는 온통 부정적인 이미지만 가득하다.
그들 뒤에는 야만, 미개, 전근대적, 호전이란 단어들이 따라 다닌다. 사실 순수하고 의리를 존중하는 그들은 처음 만난 사람에게도 빵과 잠자리를 건네는 사람들이다. 내일 당장 먹을 것이 없어도 오늘 찾아 온 손님을 그냥 돌려 보내는 법이 없다. “공동체에 한 톨의 양식이라도 남아있는 한 굶주리는 자가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그들의 삶의 철학이고 공동체 정신이다. 이처럼 오아시스에는 물과 나눔이 넘친다. 호전적이고 약육강식의 법칙 밖에 모른다는 서구중심의 이슬람과 아랍인 묘사는 사실과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왜 이슬람과 아랍은 우리에게 온통 부정적이야 할까? 우리의 시각과 시선으로 중동 지역과 이슬람 문화를 들여다 볼 기회와 채널이 없었기 때문이다. 신문 외신 란에 실리는 자살 폭탄테러, 전쟁, 갈등, 분쟁이란 단어로만 그들을 보고 그들의 진정한 삶의 모습과 고민의 언저리들을 들여다 볼 창이 없었다는 뜻이다. 더욱 심각한 왜곡은 중동과 이슬람의 문제를 온통 적대적 이해당사자인 미국과 유대중심의 언론 과 관점으로 보아왔다는 점이다. 지난 50년간 객관과 공정보도라는 허울에 빠져 체계적이고 구조적으로 양산된 지적 편중이 우리를 인식의 식민상태에 놓이게 한 것이다. 이런 왜곡 현상은 너무나 팽배해 있어 적어도 균형감각을 갖게 될 때까지만 해도 한 세대는 더 기다려야 될지도 모른다. 그 결과 한국사회의 내노라 하는 지식인들조 차도 “아랍=이슬람” 등식 속에서 무엇이 아랍의 전통이고 악습인지, 무엇이 이슬람의 진정한 가르침인지 거의 구분하지 못한다. 일부다처, 근친 결혼, 여권탄압, 침략과 호전성 같은 것들은 이슬람과 거리가 먼 유목사회의 관습임에도 모두가 이슬람과 관련지어 생각한다.
2. 이슬람의 분포
현재 이슬람을 믿는 인구는 14억에 이른다. 이슬람 국가로 유엔에 가입하고 있는 나라만도 57개국에 이른다. 지구촌 4분의 1에 육박하는 세계최대 단일 문화권이다. 그런데 이슬람 세계에서 아랍권이 차지하는 비중은 인구와 분포에서 전체의 25% 정도이다. 나머지 대부분의 이슬람은 아시아에 집중되어 있다. 세계 최대 이슬람 국가가 인도네시아이고 무슬림 인구수로 두 번째 나라가 1억 8천만의 인도이다.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는 물론 중앙아시아 전역도 이슬람권이다. 8세기 이미 이슬람화된 이후 오늘날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기즈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타지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아제르바인잔 등이 모두 약 2억의 인구를 갖고있는 이슬람 국가다. 동남아에서는 말레이시아, 부르나이는 물론 불교 국가인 태국에도 4백만, 가톨릭 국가인 필리핀에도 5백만의 무슬림들이 단단한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다. 중국에도 5천만에서 1억 정도의 무슬림들이 분포해 있다고 한다. 이렇게 보면 이슬람은 우리와 이웃한 아시아의 종교가 아닌가.
3. 이슬람의 태동과 성장
이슬람교는 610년 아라비아의 심장부 메카에서 한 평범한 인간인 무함마드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완성한 종교이다. 이슬람교는 흔히 回 敎. 回回敎 또는 마호멧교 등으로도 지칭되고 있다. 그러나, 회교, 회회교는 중국이 이슬람교를 위구르인들을 통해 받아들이게 됨으로써 위구르(回紇, 回鶻)의 종교라는 의미에서 유래되었고, 무함마드교는 예수를 믿는 예수교(기독교), 부처를 믿는 불교라는 개념의 연장선에서 무함마드를 믿는 종교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슬람은 유일신 하나님(아랍어로 알라)을 믿는 종교이다. 무함마드는 하나님의 계시를 꾸란(코란)이란 형태로 인류사회에 전달한 마지막 예언자이고, 한줌 신성(神性)도 갖지 아니한 완전한 인격체에 불과하다. 따라서 회교나 무함마드교라는 용어는 이슬람교의 본질에 비추어 부적절한 표현이다.
가. 무함마드의 등장과 이슬람교의 성립
5세기말 6세기초 중동-오리엔트 사회는 비잔틴과 사산조 페르시아라는 양대 초강 세력이 대치하고 있었다. 두 제국은 오랜 전쟁으로 국력이 쇄진하였고, 인근 복속민족들에 대한 가혹한 수탈로 정치적 불안이 고조되었다. 비잔틴과 사산조 페르시아 양 제국이 오랜 전쟁으로 지쳐있을 때, 이슬람교가 메카의 명문 꾸라이쉬 (Quraish) 가문의 무함마드에 의해 완성되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다. 570년경 유복자로 태어난 무함마드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고,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자립과 독립심이 남달리 강했던 사막의 아들이었다. 시리아와 예멘을 잇는 대상활동에 참가한 그는 당시 중동전 역에 만연해 있던 타락한 사회상에 깊이 고뇌하였다. 긴 명상에 들어간 무함마드는 40세 되는 해인 610년 드디어 가브리엘 천사의 인도로 신의 계시를 받게 된다. 이 계시는 점하나 획 하나 틀리지 않고 꾸란이란 형태로 집대성되었다.
이슬람은 우상숭배타파, 평등과 평화를 표방 하는 철저한 일원적 유일신 사상을 강조하면서, 새로운 입지를 마련해 갔다. 아담에서 아브라함, 모세, 예수로 이어지는 성경상의 많은 선지자들은 시대적 임무를 띤 훌륭한 인간 예언자로 인정되고 추앙되었다. 무함마드는 예수 이후에 신에 의해 보내진 마지막 예언자로서 앞선 복음의 부정을 위해서가 아니라, 변질된 신의 진리와 곡해된 말씀을 바로잡고 완성하는 사명을 가졌다고 보았다.
따라서 꾸란은 모세오경, 시편, 복음서 등 앞선 경전들의 내용을 순화, 보완해 주거나 확증해 주는 최후의 경전이 되기 때문에, 이 땅에서의 종교는 이슬람으로 완성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한 줌의 신성도 갖지 않는 최고의 인격체로서의 예언자관과 신과 인간의 직접 교통, 계급과 인종, 피부색을 초월한 만민의 평등과 구체적 형제애 의식이야말로 하층민을 파고든 이슬람의 차별성이고 강점이었다.
그러나, 무함마드의 보편적 종교사상은 당시 우상숭배자들인 기득 상류층의 종교적 권위와 상업적 질서를 위협하였기 때문에 메카에서 극심한 배척을 당하였다. 결국 유대인의 협력과 도움으로 메니다로 이주해 갔고(헤지라), 메카와 몇 차례 전투에서 기적적인 승리를 거둠으로써 초기 이슬람 국가의 급속한 발전을 가능케 해주었다. 무함마드는 메카인에 대한 정치적 보복을 자제하고 주변의 수많은 부족들과 우호조약을 체결하여 그들을 이슬람사회의 범주로 끌어들이는데 성공하였고, 이러한 방식은 후일 이슬람 정복시기의 기본정책으로 기능했다.
단시일내에 정복사업이 성공할 수 있었던 내적 요인은 당시 침체된 아라비아 일대의 상업과 목축업으로는 늘어나는 이슬람 공동체의 생존에 충분치 못했으므로 이주지와 비옥한 경작지의 획득, 공납지의 확대, 안정된 교역로의 확보 등이 절실히 요구 되었기 때문이었다. 외적인 요인으로는 비잔틴과 페르시아 제국의 끊임없는 교전으로 인한 피폐, 양 제국의 강압적인 통제 정책과 과중한 조세수탈로 인해 민심의 이반 등을 들 수 있다.
한편 이슬람교가 철저한 일신교로서 참신앙에 대한 긍지가 강했고, 새정복지에서 살륙과 직접 통치 보다는 공납과 간접통치를 선호함으로써 무혈의 정복사업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4. 중세 이슬람의 번영과 쇠퇴
이슬람 세계는 압바스 시대(751~1258) 500년 간 전성기를 맞았다. 이 시기에 비아랍인들의 아랍화가 활발히 추진되어, 아랍, 시리아, 페르시아적 요소들이 골고루 융합된 보다 폭넓은 이슬람 문화가 발전하였다. 압바스 제국은 5대 칼리프 하룬 알-라쉬드(Harun al-Rashid,786~809) 와 그의 아들 마문(Mamun,813~832)시대에 번성기를 맞이하였다. 이때 바그다드는 당의 장안과 함께 세계교역과 문화의 중심지로서 번성하였고, 활발한 육해상 실크로드의 개척으로 동서문 물이 물밀듯이 유입되었다. 특히 중국으로부터의 제지술의 도입은 종이혁명을 가져와 그리스로마의 고전이 번역, 재해석되고, 학문이 꽃을 피어 이슬람의 르네상스를 맞이하였다. 유럽이 암흑의 질곡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중세의 이슬람세계는 세계 최고의 문명을 자랑하는 가장 찬란한 시대를 살았다. 당시 세계에 이슬람 세계만큼 광범위하고 통일된 정치체제와 문화의 통일성을 가진 문화권은 없었다. 그리스-로마의 학문을 보존하여 유럽에 전해 준 아랍세계의 문화적 교량역할이 유럽의 르네상스를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었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그리고 중세 아랍의 학문과 세계문화는 지금도 우리의 주변에서 간접적인 영향을 발휘하고 있다. 천문학(astronomy), 점성학(astrology), 화학(chemistry), 연금술(alchemy), 대수학 (algebra), 연산학(algorism) 같은 학술용어는 물론 알칼리, 알코올, 설탕(sugar), 레몬, 커피, 음악(music), 시럽, 자스민, 파자마 같은 생활 용어가 아랍어에서 파생 되었거나 아랍세계에 의해 세계에 전파 되었다는 사실이다.
5. 이슬람 중세의 마감과 근대화
세계 최고에 자만하던 중세의 이슬람은 14세기 오스만제국으로 이어졌고, 1683년 비엔나 전투에서 오스만 터키가 패배 함으로써 마침내 유럽의 대반격이 시작되었다. 이슬람 세계가 아직도 정신적인 가치의 우월감에 사로잡혀 있을 때, 유럽은 자본주의와 합리주의를 바탕으로 새로운 물질문명의 틀을 구축해 나갔다. 그러는 사이 이슬람 세계는 과학과 군사면에서 발전하는 유럽과의 간격이 점점 벌어져갔다. 결국 18세기 이후 자기 혁신에 실패한 이슬람 세계는 산업화에 성공한 유럽에 점점 뒤쳐지기 시작했다. 특히 유럽의 신무기 개발과 국제무역 에서의 주도권 확보는 유럽과 이슬람 세계간의 종전의 위상을 근원적으로 뒤바꾸어 놓았다. 유럽과 다른 아시아 국가들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한 군비증강과 크고 작은 전쟁비용에 오스만 제국의 경제는 급격히 쇠락하였다. 인플레이션과 계속된 가격상승은 일반 대중들의 삶을 뿌리째 흔들어 놓았고, 대항해 시대와 함께 대서양에서 아프리카 남단을 거쳐 인도양에 이르는 새로운 항로를 개척한 유럽의 대외무역 독점으로 중동 지역이 누려왔던 중계무역의 경제적 이익이 심각하게 침탈 당했다. 무역 불균형의 심화로 금과 은의 유출도 극심했다. 무엇보다 기술력의 부족으로 인한 농업생산의 감소와 조선술과 무기체계에서의 중동의 열세는 국력의 걷잡을 수 없는 쇠퇴를 가속화시켰다.
6. 오해받는 이슬람
가. 한 손에 꾸란, 한 손에 칼
일찍이 서구인들이 이슬람인들에 의한 단시일의 정복사업을 소위 “한 손에 꾸란, 한 손에 칼” 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이슬람의 호전성과 강제전파를 설명하였다. 그러나 이는 그들의 이교도에 대한 적개심과 확산되는 이슬람 세력에 대한 위기감에서 만들어진 용어에 불과하다. 오히려 개종하게 되면 인두세나 토지세 등의 일부가 면제 되었음으로 정부는 국가수입의 증대를 위해 피정복민의 개종 보다는 공납을 요구하였다. 또한 공납의 액수도 비잔틴이나 페르시아의 수탈에 비하면 가벼운 것이었음으로 이슬람 제국하에서 그리스도교인 유대교도들은 상당한 종교의 자유와 경제적 기득권을 향유하고 있었다. 불행히도 아무런 역사적 근거도 없는 “한 손 에 꾸란, 한 손에 칼” 이란 용어가 교과서에서 삭제될 때까지 우리는 1세기를 기다려야 했다. 이 용어는 지난 1세기 동안 서구인은 물론 한국 인의 이슬람에 대한 인식세계를 지배하던 망령이었다.
나. 일부다처 문제
일부다처는 부인을 넷까지 거느린다는데, 그게 현대생활에 맞는 것이냐? 너무 남성 위주의 종교가 아닌가? 이슬람의 기본 결혼제도는 일부일처이다. 다만 전쟁과 기근과 같은 특수한 상황에서 다처의 문을 열어놓고 있다는 점이다.
“만일 너희가 고아들을 공평하게 대해줄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이 있다면, 결혼을 할 것이니, 너희가 마음에 드는 여인으로 둘, 셋, 넷을 취할 것이다. 그러나 그녀들을 공평하게 대해 줄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이 생긴다면 한 여인으로 족하니라…”(꾸란 4;3)
초기의 일부다처는 인도적인 입장에서 여성들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로 출발한 것이 분명하다. 무함마드가 메카인과의 세 차례에 걸친 치열한 전투 끝에 많은 동료들을 잃고 메니나를 이끌어나갈 때, 고아와 미망인의 문제는 심각하였다. 일부다처 계시가 그런 상황에서 메디나에서 주어진다는 사실이 이런 사정을 말해준다. 교역과 목축이 주가되는 사회체제에서 여자가 고아들을 데리고 혼자 살아간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였다. 다처허용 계시가 나온 배경은 극 한적인 상황에서도 자기만 살지 않고 동료나 친구들의 가족을 함께 부양한다는 지극히 인도적인 결정이었다. 문제는 일부 현대 무슬림들이 자신의 사회적인 신분을 과시하는 수단이나 성 적욕구를 충족하는 수단으로 다처제도를 악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슬람은 일부일처가 원칙이다. 그리고 오늘날 일부국가에 국한 되기는 하나 다처를 하는 사람들은 전체인구의 5% 미만이 다. 현재는 많은 이슬람국가에서 일부다처를 법으로 금지하는 추세가 확산되고 있다. 일부다처를 하더라도 그것은 축첩의 개념이 아니고, 4명의 아내가 모두 정실 부인이다. 네 아내의 상속지분은 동일하고 사회적 편견이나 차별도 없다. 그리고 네 아내의 자식들도 모두 적자로 하는 등의 법적, 사회적 차별이 없다.
다. 차도르, 여성할례와 여성억압 기제
이슬람의 차도르는 정숙함의 상징이다. 외간 남자들을 자극하여 정숙함을 잃지 말라는 꾸란의 가르침에 근거한다. 따라서 얼굴까지 가리고 남성과 눈길을 주고받았다고 해서 공개적인 처벌을 받는 극단적이 일부 이슬람사회의 행태는 이슬람의 본질적인 가르침에 근거하지 못한다. 여성할례는 이슬람의 가르침과 관련 없는 아랍의 토착적 관습이다. 남성할례가 하나님 앞에서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한다는 가르침에 비추어 신체의 가장 더러워지기 쉬운 부분을 정화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지만, 여성할례는 그러한 의미를 주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슬람의 기본 성격은 남녀의 역할이 혼동되는 것이 아니라 남녀가 뚜렷이 구별되는 사회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꾸란에서는 남녀 동등의 가치가 중요시되고 강조되고 있지만, 이 동등이 남녀 간의 동일체나 나아가서 외적가치의 균등까지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여성차별의 개념이 아니고 여성유별의 개념인 셈이다. 이런 면에서 이슬람사회는 남녀사이의 외적, 정서적, 지적 차이가 없다면, 사회에서의 그들의 역할과 기능에 있어서도 당연히 차이가 없어야 된다는 서구사회의 인식을 단호히 부정한다. 이런 면에서 이슬람 사회는 남녀의 역할분담과 상호보완, 기능의 분화를 인정하는 셈이다. 즉, 노동의 문제에서 남성에게는 보다 많은 경제적 책임을 부과하는 반면(꾸란 2:233,240,241/ 4:34 참조), 여성에게는 자녀의 양육과 보호에 더 많은 기여를 요구한다(꾸란 2:233, 7:189). 유산분배에 있어서 경제적 책임을 갖는 남성에게 여성보다 더 많은 상속을 인정한다.
동시에 여성에게는 가정경제 와 자녀양육, 가족의 정서적 조화와 복리에 더 많은 역할과 권리가 주어진다. 이런 측면을 이해하면 여성 차별 조항으로 자주 거론되는 꾸란의 몇몇 구절은 재해석 되어야한다. 즉 코란 2장 228절의 “남자는 여자의 상위에 있다”는 표현이나, 꾸란 4장 34절의 “남자는 힘이 강하여 여자 의 보호자가 된다”는 표현, 그리고 상속에서 남녀 간의 배분율을 2:1로 하는 조항(꾸란 4:11) 등 은 남성우월주의 보다는 이슬람사회의 남녀역 할과 기능분담의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다만 1,400년 전 이슬람의 여성관은 분명 여권혁 명을 의미하는 인류역사상 가장 놀라운 변화임에도 현재적 서구 관점과 획일화된 가치관으로 바라보는 이슬람권 여성은 일반적으로 남성에 비해 열등하고 차별화 존재로 각인되어 있다. 이는 1차적으로 코란의 재해석과 현실 문제와의 절충이 다른 종교들 보다는 그 폭이나 수용방식에서 매우 제한적인데 기인한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이것은 이슬람 종교의 문제라기 보다는 이슬람 국가가 처해 있는 사회적 구조와 관습, 민도, 여성의 교육정도 등과 밀접하게 관련된 문제이다. 무엇보다 여성의 지위와 관련 하여 여성내부의 인식의 다양성과 복합성, 차별 의식조차 갖지 못하는 여성자체의 문제인식 정도도 매우 중요한 요인이다. 그것은 같은 이슬람 국가라도 여성 수상을 배출하고 여성의 정치․사회적 참여가 서구 유럽 국가들 보다도 오히려 앞서고 있는 터키 같은 나라가 있는 반면에, 아직도 여성을 매질하고 남성중심 사회의 노예처럼 부리는 이슬람 사회도 엄연히 상존한다. 또는 여성의 운전 허용이 뜨거운 감자로 사회적 이슈가 되는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나라도 있다.
결론적으로 이슬람 법의 해석이 가부장적 사회제도와 부계중심 구조에 근거하고 있는 한, 아내와 딸 어머니로서 여성의 지위는 남성에 비해 열등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이슬람 사회의 현실이다. 그러나 코란에서는 분명하고 단호하게 여성을 현대사회에서 차별하도록 하는 어떤 제약이나 금기를 두고 있지 않다. 이런 점이 지금 대부분의 이슬람 사회에서 인식되어 여성의 사회진출과 정치참여, 사회 전부분에서 여성의 놀라운 약진을 가져다주고 있다. 비록 여성에 대한 인식의 변화나 여성 스스로의 변화가 아직은 서구적 기준에서 보면 매우 느리고 미진한 수준이지만, 그 변화의 속도 또한 그 문화권 사람들이 결정해야 한다. 사회에 대한 기여와 여 성능력의 발휘라는 구호아래 가정을 뛰쳐나간 그 공백을 이슬람사회는 아직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고, 건강한 가정과 자녀들의 교육이야말로 더욱 의미있는 사회적 기여라는 공감대가 아직은 강하게 작용한다. 결국 여성의 사회 진출과 자질의 발산에 대한 가치관은 문화권에 따라 서로 다르게 적용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선악과 우열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이고 가치관의 차이일 수 있기 때문이다.
7. 샤리아(Shariah)라고 불리는 이슬람 법
1) 샤리아의 어원 : 올바른 길
2) 법과 종교의 연결 :
이슬람은 정교 일치적 특징을 가진다. 종교가 삶과 유리되어 관념적 도덕 체제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삶속에서 녹아 모든 행위 하나 하나에 깊숙이 간여한다. 따라서 이슬람 법의 모든 해석도 예배, 단식, 순례, 세정의식, 금기 같은 종교적 의무나 숭배행위로부터 출발한다. 법을 변화하는 사회의 필요성과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한 인간의 지혜나 이성의 산물로 본 것이 아니라, 성스러운 영감을 가진 불변의 진리로 생각되었다.
샤리아는 사회의 최고 상위법으로 자리 잡았고, 법의 위반은 단순히 사회질서의 규범을 침해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종교적 불복종 행위로 간주된다.
①인간의 영적 생활에 부과된 법적 의무(신과 인간의 관계-종교적 계율) → 오주(예배, 신앙의 고백, 단식, 순례, 희사(자카트) 등
②인간의 외적 활동에 부과된 제한적 규범(인 간과 인간의 관계) → 개인의 지위, 결혼, 이혼, 상속, 재산권, 상업활동, 형벌
이슬람 법에서는 민사, 형사, 기타 법의 뚜렷한 독자적 구분 보다는 서로 혼재되고 상호유기적으로 작용한다.
3) 샤리아(성법)의 원천
①꾸란
②하디스
③키야스(유추)
④이즈마(합의) 샤리아는 성문법으로 수립되지 못했다.
4)법적인 허용과 제한
①신자들의 의무행위(꼭 지켜야 되는 것)
②의무는 아니지만(권장행위)
③대수롭지 않는 행위
④(금지된 것은 아니지만)바람직하지 않는 행위
⑤금지된 행위 윤리적인 것이 법에도 깊숙이 간여한다.
5) 샤리아 학파
①하나피 학파-서아시아 이집트 남부 터키 중앙아시아 파키스탄
②샤피학파-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③말리키 학파-북서아프리카 이집트 북부
④한발리 학파-이라크 시리아 사우디 아라비아(와하비)
6) 샤리아 법 해석의 위계 구도
①쉐이크 알 이슬람
②무푸티
③카디 파트와Fatwa(종교적 유권해석)
7)오늘날 이슬람 사회에서의 샤리아 위치
거의 대부분의 이슬람 사회에서 샤리아는 이미 폐기처분되거나, 고유한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남아있는 경우에도 구체적인 실정법으로서의 기능보다는 상속과 결혼, 작명 등 관습법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세속법(Qanun)이 점차 확산되고 잇는 추세다. 가장 엄격히 샤리아가 적용되고 있는 나라가 사우디 아라비아, 이란, 수단, 붕괴직전의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 정도이고, 걸프 지역 아랍국가들은 상징적으로 존치시키고 있다.
같은 이슬람 국가라도 터키 같은 곳에서는 오히려 샤리아가 금지되어 있으며, 사형제와 간통제까지 최근 폐지하였다.
<이 희 수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중동학회 회장 >
-제60회 변호사연수회/강좌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