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의 지배시절의 스페인
서고트의 위티사 왕(700~710 재위) 시대에 칼리프의 아랍군이 북모로코를 정복하고 711년 7월 베르베르족이 해협을 건너 침공한 이래, 수도 톨레도를 비롯하여 세비야·메리다·사라고사·레온·갈리시아·포르투갈 등을 차례로 정복하고, 스페인의 거의 모든 지역에 지배권을 확립했다. 서고트족은 대체로 저항다운 저항을 받지 않았다. 서고트의 호족은 이슬람교로 개종하자 공납(貢納)을 조건으로 하여 넓은 영지를 허락받았다. 유대인은 박해를 피할 수 있게 되어 이슬람교도의 열렬한 동맹자가 되었고, 농노도 일정한 자유를 얻었다. 아랍인은 끊임없이 이주해왔지만 전국토를 식민지화하기에는 너무 소수였기 때문에 그들은 행정적·군사적 조직을 구축하고 봉토(封土)를 할당해 체제를 유지해나갔다. 755년 우마이야 왕조의 아브드 알 라흐만 1세는 스페인에 상륙하여 756년 코르도바를 점령해 스페인의 우마이야 왕조를 창건했다. 이 왕조는 아브드 알 라흐만 2세(822~852 재위)의 치세에 이르러 경제적·문화적 번영의 기초를 세웠다. 무하마드 1세(852~886 재위) 때에는 스페인인 개종자(muwallad)와 베르베르족의 반란이 끊이지 않아 평화는 또다시 깨어졌다. 아브드알라(압둘라)의 손자 아브드 알 라흐만 3세(912~961 재위)는 확고하고 선견지명이 있는 지도자로서, 왕국을 어려움에서 건져내고 권력과 문화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리고 10년 안에 이슬람 왕국을 재통일하고 929년에는 스스로를 칼리프라 칭했다. 그러나 1009년경 슬라보니아인과 베르베르족이 연달아 코르도바를 점령하고 그밖의 이슬람 왕국도 우마이야 왕조에 등을 돌려 이슬람 사회는 소왕국인 타이파(tāifa)로 분열했다. 이들은 아랍인 타이파, 베르베르족 타이파, 노예집단 타이파로 크게 분류할 수 있다. 이슬람 사회의 이런 내부 분열은 북부에 있는 가톨릭 왕국들의 영토확장을 용이하게 했다. 결국 톨레도 함락 후 이슬람교도들은 알모라비데족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이베리아 반도에 상륙한 알리 이븐 유수프(1106~43)의 지휘로 이슬람 세력은 사라고사까지 점령했으나 아라곤 왕 알폰소 1세와 그의 양아들인 카스티야 왕 알폰소 7세의 저항으로 차츰 쇠퇴하기 시작했다.
스페인에서 멸망한 이슬람
11세기가 지나는 동안 스페인의 우마이야 왕조는 몰락하고,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수많은 소공국이 탄생하여 서로 투쟁을 일삼았다. 그라나다와 톨레도를 점령한베르베르인들과 안달루시아를 차지했던 아미르 왕조 등이 그들이다. 비록 정치적으로는 산산조각이 났지만 스페인 무슬림들의 종교적 정체성은 유지되었고, 그런 가운데 풍요를 누렸다. 그러나 기동교인들이 스페인 땅을 되찾으려 애쓰면서 사정이 크게 변했다. 1085년 카스티야의 알폰소 6세가 톨레도를 점령하자 아프리카 알모라드데 왕조가 끼어 들었다. 그들은 기독교인들의 친출을 막았다. 그러나 모로코 지역에 거점을 둔 이들이 이베리아 반도를 통치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어서 주민들의 저항에 부딪혔고, 이는 1147년 이래 알모하데 왕조가 권력을 쥐고 있던 모로코 정권을 약화시켰다. 알모하데 왕조는 1212년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에서 기독교에게 패했다. 이후 기독교도의 전진은 더 이상 막을 수가 없게 되었다. 1243년에는 코르도바, 1238년에는 발렌시아, 1243년에는 무르시아, 그리고 이어 1248년에는 세비야가 그들의 손에 들어갔다. 이제 스페인 땅에서 이슬람은 그라나다만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나스르 왕조가 1492년까지 이곳을 다스렸다. 그러나 기독교들이 스페인을 탈환했다고 해서 이슬람의 문화/종교 유산이 스페인 땅에서 아주 사라진 것은 결코 아니었다.
아랍 유산
칼리파가 지재하던 시기에 스페인 무슬림들은 무엇보다 문화 발전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활을 했다. 사회는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 있었고 관용 정신이 지배했다. 이곳은 학문을 연구하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어서 수많은 지식인들이 동경해 마지 않았다. 예를 들어 이븐 마사라(833-931) 같은 철학자는 이곳에서 시아파의 종교적 관점과 수피의 신비주의 원리, 그리고 플라톤의 철학을 하나로 융합시키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톨레도나 코륻호바와 같은 도시에서는 학자들이 고대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지혜와 지식에 새로운 학문적 성과를 접합시켰다. 의학 부에에서는 칼렌의 저술뿐만 아니라 1세기에 생존했던 학자 디오스쿠리데스의 저술에 대한 재발굴도 이루어졌다. 아부 알 카심이 쓴 의학 백과사전은 오늘날에도 눈여겨 볼 만한 것이다.
10세기 이후부터는 천문학, 기하학 분야의 책을 비롯해서 아랍어로 쓴 수많은 책이 라틴어로 번역되었다. 기독교도글이 스페인을 탈환한 직후 이슬람 세계와 기독교 서계가 직접 만난 것은 유럽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카스티야 왕 알폰소 10세는 수많은 아랍 서적을 카스티야오로 번역하도록 했다. 그 중에는 코란도 있었다.
서고트의 위티사 왕(700~710 재위) 시대에 칼리프의 아랍군이 북모로코를 정복하고 711년 7월 베르베르족이 해협을 건너 침공한 이래, 수도 톨레도를 비롯하여 세비야·메리다·사라고사·레온·갈리시아·포르투갈 등을 차례로 정복하고, 스페인의 거의 모든 지역에 지배권을 확립했다. 서고트족은 대체로 저항다운 저항을 받지 않았다. 서고트의 호족은 이슬람교로 개종하자 공납(貢納)을 조건으로 하여 넓은 영지를 허락받았다. 유대인은 박해를 피할 수 있게 되어 이슬람교도의 열렬한 동맹자가 되었고, 농노도 일정한 자유를 얻었다. 아랍인은 끊임없이 이주해왔지만 전국토를 식민지화하기에는 너무 소수였기 때문에 그들은 행정적·군사적 조직을 구축하고 봉토(封土)를 할당해 체제를 유지해나갔다. 755년 우마이야 왕조의 아브드 알 라흐만 1세는 스페인에 상륙하여 756년 코르도바를 점령해 스페인의 우마이야 왕조를 창건했다. 이 왕조는 아브드 알 라흐만 2세(822~852 재위)의 치세에 이르러 경제적·문화적 번영의 기초를 세웠다. 무하마드 1세(852~886 재위) 때에는 스페인인 개종자(muwallad)와 베르베르족의 반란이 끊이지 않아 평화는 또다시 깨어졌다. 아브드알라(압둘라)의 손자 아브드 알 라흐만 3세(912~961 재위)는 확고하고 선견지명이 있는 지도자로서, 왕국을 어려움에서 건져내고 권력과 문화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리고 10년 안에 이슬람 왕국을 재통일하고 929년에는 스스로를 칼리프라 칭했다. 그러나 1009년경 슬라보니아인과 베르베르족이 연달아 코르도바를 점령하고 그밖의 이슬람 왕국도 우마이야 왕조에 등을 돌려 이슬람 사회는 소왕국인 타이파(tāifa)로 분열했다. 이들은 아랍인 타이파, 베르베르족 타이파, 노예집단 타이파로 크게 분류할 수 있다. 이슬람 사회의 이런 내부 분열은 북부에 있는 가톨릭 왕국들의 영토확장을 용이하게 했다. 결국 톨레도 함락 후 이슬람교도들은 알모라비데족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이베리아 반도에 상륙한 알리 이븐 유수프(1106~43)의 지휘로 이슬람 세력은 사라고사까지 점령했으나 아라곤 왕 알폰소 1세와 그의 양아들인 카스티야 왕 알폰소 7세의 저항으로 차츰 쇠퇴하기 시작했다.
스페인에서 멸망한 이슬람
11세기가 지나는 동안 스페인의 우마이야 왕조는 몰락하고,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수많은 소공국이 탄생하여 서로 투쟁을 일삼았다. 그라나다와 톨레도를 점령한베르베르인들과 안달루시아를 차지했던 아미르 왕조 등이 그들이다. 비록 정치적으로는 산산조각이 났지만 스페인 무슬림들의 종교적 정체성은 유지되었고, 그런 가운데 풍요를 누렸다. 그러나 기동교인들이 스페인 땅을 되찾으려 애쓰면서 사정이 크게 변했다. 1085년 카스티야의 알폰소 6세가 톨레도를 점령하자 아프리카 알모라드데 왕조가 끼어 들었다. 그들은 기독교인들의 친출을 막았다. 그러나 모로코 지역에 거점을 둔 이들이 이베리아 반도를 통치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어서 주민들의 저항에 부딪혔고, 이는 1147년 이래 알모하데 왕조가 권력을 쥐고 있던 모로코 정권을 약화시켰다. 알모하데 왕조는 1212년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에서 기독교에게 패했다. 이후 기독교도의 전진은 더 이상 막을 수가 없게 되었다. 1243년에는 코르도바, 1238년에는 발렌시아, 1243년에는 무르시아, 그리고 이어 1248년에는 세비야가 그들의 손에 들어갔다. 이제 스페인 땅에서 이슬람은 그라나다만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나스르 왕조가 1492년까지 이곳을 다스렸다. 그러나 기독교들이 스페인을 탈환했다고 해서 이슬람의 문화/종교 유산이 스페인 땅에서 아주 사라진 것은 결코 아니었다.
아랍 유산
칼리파가 지재하던 시기에 스페인 무슬림들은 무엇보다 문화 발전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활을 했다. 사회는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 있었고 관용 정신이 지배했다. 이곳은 학문을 연구하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어서 수많은 지식인들이 동경해 마지 않았다. 예를 들어 이븐 마사라(833-931) 같은 철학자는 이곳에서 시아파의 종교적 관점과 수피의 신비주의 원리, 그리고 플라톤의 철학을 하나로 융합시키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톨레도나 코륻호바와 같은 도시에서는 학자들이 고대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지혜와 지식에 새로운 학문적 성과를 접합시켰다. 의학 부에에서는 칼렌의 저술뿐만 아니라 1세기에 생존했던 학자 디오스쿠리데스의 저술에 대한 재발굴도 이루어졌다. 아부 알 카심이 쓴 의학 백과사전은 오늘날에도 눈여겨 볼 만한 것이다.
10세기 이후부터는 천문학, 기하학 분야의 책을 비롯해서 아랍어로 쓴 수많은 책이 라틴어로 번역되었다. 기독교도글이 스페인을 탈환한 직후 이슬람 세계와 기독교 서계가 직접 만난 것은 유럽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카스티야 왕 알폰소 10세는 수많은 아랍 서적을 카스티야오로 번역하도록 했다. 그 중에는 코란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