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타시드 (Wattassids, 1471-1554) 왕조 시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매우 힘든 상황에서 모로코에 새로운 왕조가 등장했는데, 바로 베니 메린과 같은 혈통인 제넷(Zenet) 그룹의 베르베르족인 베니 와타시드(Beni-Watassids) 왕조였습니다. 원래 리비아 출신인 이 부족은 지중해 연안의 리프(Rif)에 정착했습니다. 멜릴라(Melilla)와 물루야(Moulouya) 사이에 있는 타조타(Tazouta) 요새에서 베니 와타시드 족은 몰락하는 메리니드(Merinids) 왕조를 대신해서 점차 세력을 확장해 나갔습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메리니드 왕조와 싸워서 정복하기 보다는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섭정이었습니다. 그러나 1471년부터 모하메드 알 셰이크(Mohammed al-Cheikh, 1471-1504)는 마지막 메리니드 술탄인 압드 알 하크(Abd Al-Hak,1458-1465)의 와타시드 부족 학살을 피해서 와타시드 왕조의 첫 번째 술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모로코 내부의 쇠퇴를 막고 평화와 단결을 회복하여 포르투갈의 모로코 해안 정복을 종식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와타시드 왕조의 첫 번째 군주인 모하메드 알 셰이크는 마흐젠(황실 친위대), 근위대, 정규군을 모두 아랍인으로 구성하는 친아랍 정책을 쓰며 군부 재정비를 착수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과 결혼 장려정책을 펼치는 등 아랍인들의 연정을 얻기 위한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와타시드 왕조는 그들을 포용하는데 실패했습니다. 와타시드 부족은 마리니드족과 제넷족과 가까운 혈연 관계이지만 와타시드에게는 본질적인 종교적인 구심점이 부족했습니다. 와타시드는 봉건제를 통제하고 왕국의 흩어진 땅을 통합하는 데 실패한 원인을 종교적 명분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포르투갈 군대에 대항하는 국내에서 부족간의 내전을 종결시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하여 군사력을 내전에 투입했습니다. 남쪽에서 사디안(Saadian)부족의 영향력이 점점 커지는 것이 걱정된 그들은 터키에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와타시드가 막을 수 없었던 스페인에서의 기독세력에 의한 그라나다의 함락은 그들을 더욱더 수세에 몰리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러한 무능력의 결정적인 요인 중 하나는 모로코 해안의 주요 항구인 세우타 (Ceuta, 1415 년 점령), 탕헤르 (Tanger, 1471 년 점령), 크사르 알 세기르 (et ElKsar al-Seghir, 1458 년 점령)가 포르투갈 손아귀에 넘어갔다는 사실입니다. 1492년 "가톨릭 군주", 아라곤의 페르디난드와 카스티야의 이사벨라 군대가 그라나다에서 승리한 후 안달루시아에서 거주하면 이슬람 교도들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추방되었습니다. 그들은 모로코 테투안(Tetouan), 페즈(Fez), 살레(Sale)에 정착하여 상인과 장인으로 일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불안감은 확산되었습니다. 안달루시아에서 추방된 모슬림들은 자신들이 환영받지 못하고 와타시드 정권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존재와 독창성을 통해 그들은 특히 과학 분야와 예술을 부흥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모하메드 알 셰이크 통치 기간 동안 모로코는 국토 분열과 영토 분리로 고통받았습니다. 북쪽에서는 와타시드 술탄의 권위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면서 모로코 전역에서 반란에 일어났고 남쪽에서는 마라케시 지역이 분리되어 독립을 선언했습니다. 이와 동시에 포르투갈 인은 대서양 연안을 따라 점령지를 점점 더 확장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위험한 상황에서 왕조를 승계한 네 명의 와타시드 술탄인 모하메드 알 보르투갈리 '일명: 포르투갈인'(1505-1524), 아흐메드 알 와타시(1524-1548, 이후 1548-1550), 안 나시르 알 카스리(1548), 부 하순(1554)의 통치 기간에는 포르투갈과 때때로 싸우거나 오랜 휴전을 맺었지만 와타시드 왕조는 분열의 연속이었어요. 북쪽의 테투안(Tetouan)과 세프샤우엔(Chefchaouen)의 에미르는 와타시드 술탄으로부터 사실상 독립했습니다. 게다가 이들은 포르투갈과 최전선에서 싸우면서 이슬람의 수호자이자 성전의 지도자로 칭송받게 되었습니다. 남부에서는 1522년부터 마라케시의 지배자였던 사디안 가문의 세력 부상이 와타시드 가문에 실질적인 위협이 되었습니다. "족장"으로 인정받는 사디안들은 특히 그들 중 한 명인 아부 압달라가 수스(Souss) 지역에서 포르투갈에 밀리지 않고 저항을 이끌었기 때문에 엄청난 명성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1541년 포르투갈 기독교인 원정대부터 아가디르(Agadir)를 탈환하는 데 성공했고, 1481년과 1486년에 점령한 사피(Safi)와 아젬무르(Azemmour) 탈환에 성공했습니다. 그들은 이슬람의 구원자 것처럼 보였고 와타시드는 남쪽의 사아디안 부족과 짧은 휴전을 맺고 연합해서 포르투갈 대군과 싸울 수 있었습니다. 이 전쟁은 와타시드의 몰락과 사디아인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와타시드 왕조가 모로코의 내부 분열의 봉합 그리고 포르투갈 정복을 종식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이미 메리니드 시대부터 시작된 모로코의 쇠퇴는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모로코의 경제, 문화, 예술은 총체적인 불안과 불안정 속에서 번성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심각한 타격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15세기 말과 16세기 초에 새로운 농촌 '문화' 중심지인 자우이아(Zaouiya)가 생겨나면서 큰 위기의 시기에 특징적인 종교 생활의 부흥이 일어났음을 증명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 종교 전파의 중심은 더 이상 중앙당국의 지원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곳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자우이아는 지하드 개념, 멸종 위기에 처한 가치의 보존,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이슬람 규칙에 대한 순종 강화, 토론과 지적 교류에 대한 불신에 의해 지배되는 "헌신적인" 형태의 종교적 가르침을 제공했습니다. 그 후 자우이아들은 제자들을 종교적으로 훈련시켰고 그들을 이용해서 영향력을 적극적으로 전파했습니다.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매우 힘든 상황에서 모로코에 새로운 왕조가 등장했는데, 바로 베니 메린과 같은 혈통인 제넷(Zenet) 그룹의 베르베르족인 베니 와타시드(Beni-Watassids) 왕조였습니다. 원래 리비아 출신인 이 부족은 지중해 연안의 리프(Rif)에 정착했습니다. 멜릴라(Melilla)와 물루야(Moulouya) 사이에 있는 타조타(Tazouta) 요새에서 베니 와타시드 족은 몰락하는 메리니드(Merinids) 왕조를 대신해서 점차 세력을 확장해 나갔습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메리니드 왕조와 싸워서 정복하기 보다는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섭정이었습니다. 그러나 1471년부터 모하메드 알 셰이크(Mohammed al-Cheikh, 1471-1504)는 마지막 메리니드 술탄인 압드 알 하크(Abd Al-Hak,1458-1465)의 와타시드 부족 학살을 피해서 와타시드 왕조의 첫 번째 술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모로코 내부의 쇠퇴를 막고 평화와 단결을 회복하여 포르투갈의 모로코 해안 정복을 종식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와타시드 왕조의 첫 번째 군주인 모하메드 알 셰이크는 마흐젠(황실 친위대), 근위대, 정규군을 모두 아랍인으로 구성하는 친아랍 정책을 쓰며 군부 재정비를 착수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과 결혼 장려정책을 펼치는 등 아랍인들의 연정을 얻기 위한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와타시드 왕조는 그들을 포용하는데 실패했습니다. 와타시드 부족은 마리니드족과 제넷족과 가까운 혈연 관계이지만 와타시드에게는 본질적인 종교적인 구심점이 부족했습니다. 와타시드는 봉건제를 통제하고 왕국의 흩어진 땅을 통합하는 데 실패한 원인을 종교적 명분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포르투갈 군대에 대항하는 국내에서 부족간의 내전을 종결시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하여 군사력을 내전에 투입했습니다. 남쪽에서 사디안(Saadian)부족의 영향력이 점점 커지는 것이 걱정된 그들은 터키에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와타시드가 막을 수 없었던 스페인에서의 기독세력에 의한 그라나다의 함락은 그들을 더욱더 수세에 몰리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러한 무능력의 결정적인 요인 중 하나는 모로코 해안의 주요 항구인 세우타 (Ceuta, 1415 년 점령), 탕헤르 (Tanger, 1471 년 점령), 크사르 알 세기르 (et ElKsar al-Seghir, 1458 년 점령)가 포르투갈 손아귀에 넘어갔다는 사실입니다. 1492년 "가톨릭 군주", 아라곤의 페르디난드와 카스티야의 이사벨라 군대가 그라나다에서 승리한 후 안달루시아에서 거주하면 이슬람 교도들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추방되었습니다. 그들은 모로코 테투안(Tetouan), 페즈(Fez), 살레(Sale)에 정착하여 상인과 장인으로 일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불안감은 확산되었습니다. 안달루시아에서 추방된 모슬림들은 자신들이 환영받지 못하고 와타시드 정권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존재와 독창성을 통해 그들은 특히 과학 분야와 예술을 부흥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모하메드 알 셰이크 통치 기간 동안 모로코는 국토 분열과 영토 분리로 고통받았습니다. 북쪽에서는 와타시드 술탄의 권위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면서 모로코 전역에서 반란에 일어났고 남쪽에서는 마라케시 지역이 분리되어 독립을 선언했습니다. 이와 동시에 포르투갈 인은 대서양 연안을 따라 점령지를 점점 더 확장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위험한 상황에서 왕조를 승계한 네 명의 와타시드 술탄인 모하메드 알 보르투갈리 '일명: 포르투갈인'(1505-1524), 아흐메드 알 와타시(1524-1548, 이후 1548-1550), 안 나시르 알 카스리(1548), 부 하순(1554)의 통치 기간에는 포르투갈과 때때로 싸우거나 오랜 휴전을 맺었지만 와타시드 왕조는 분열의 연속이었어요. 북쪽의 테투안(Tetouan)과 세프샤우엔(Chefchaouen)의 에미르는 와타시드 술탄으로부터 사실상 독립했습니다. 게다가 이들은 포르투갈과 최전선에서 싸우면서 이슬람의 수호자이자 성전의 지도자로 칭송받게 되었습니다. 남부에서는 1522년부터 마라케시의 지배자였던 사디안 가문의 세력 부상이 와타시드 가문에 실질적인 위협이 되었습니다. "족장"으로 인정받는 사디안들은 특히 그들 중 한 명인 아부 압달라가 수스(Souss) 지역에서 포르투갈에 밀리지 않고 저항을 이끌었기 때문에 엄청난 명성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1541년 포르투갈 기독교인 원정대부터 아가디르(Agadir)를 탈환하는 데 성공했고, 1481년과 1486년에 점령한 사피(Safi)와 아젬무르(Azemmour) 탈환에 성공했습니다. 그들은 이슬람의 구원자 것처럼 보였고 와타시드는 남쪽의 사아디안 부족과 짧은 휴전을 맺고 연합해서 포르투갈 대군과 싸울 수 있었습니다. 이 전쟁은 와타시드의 몰락과 사디아인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와타시드 왕조가 모로코의 내부 분열의 봉합 그리고 포르투갈 정복을 종식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이미 메리니드 시대부터 시작된 모로코의 쇠퇴는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모로코의 경제, 문화, 예술은 총체적인 불안과 불안정 속에서 번성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심각한 타격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15세기 말과 16세기 초에 새로운 농촌 '문화' 중심지인 자우이아(Zaouiya)가 생겨나면서 큰 위기의 시기에 특징적인 종교 생활의 부흥이 일어났음을 증명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 종교 전파의 중심은 더 이상 중앙당국의 지원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곳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자우이아는 지하드 개념, 멸종 위기에 처한 가치의 보존,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이슬람 규칙에 대한 순종 강화, 토론과 지적 교류에 대한 불신에 의해 지배되는 "헌신적인" 형태의 종교적 가르침을 제공했습니다. 그 후 자우이아들은 제자들을 종교적으로 훈련시켰고 그들을 이용해서 영향력을 적극적으로 전파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