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사블랑카 회담
Casablanca Conference
제2차 세계대전중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과 윈스턴 처칠, 그리고 그들의 군사 보좌관 및 참모총장이 카사블랑카에서 개최한 회의(1943. 1. 12~23).
서방 연합국을 위한 앞으로의 국제군사전략을 기획했다. 이 회의에는 요시프 스탈린도 초청되었으나 참석하지 않았다. 회의 내용은 북아프리카 원정을 마친 뒤 시칠리아에 대한 침공 결정, 태평양 전장(戰場)에 대한 병력 할당, 극동 지역의 주요공격선 결정, 독일에 대한 집중폭격 합의 등 주로 군사적인 것이었다. 또한 루스벨트와 처칠은 핵 폭탄 연구에 관해 논의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독일·이탈리아·일본에게 무조건 항복을 요구한 것이다. 무조건 항복 선언 및 정책은 전쟁이 끝난 뒤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독일 국내의 반대 세력들이 연합국의 보복이 두려워 위축되지 않았더라면 아돌프 히틀러를 무너뜨리고 조기에 평화협상을 할 수 있었으리라는 주장이 일자, 처칠은 독일을 분할하거나 완전히 비무장화하는 것, 강제노역과 물품으로 배상받는 것 등 그 당시 연합국 지도자와 국민들이 받아들일 만한 어떤 협상안도 더욱더 반대 세력을 낙담시켰을 것이라고 답변했다.
한국 브리태니커 온라인
Casablanca Conference
제2차 세계대전중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과 윈스턴 처칠, 그리고 그들의 군사 보좌관 및 참모총장이 카사블랑카에서 개최한 회의(1943. 1. 12~23).
서방 연합국을 위한 앞으로의 국제군사전략을 기획했다. 이 회의에는 요시프 스탈린도 초청되었으나 참석하지 않았다. 회의 내용은 북아프리카 원정을 마친 뒤 시칠리아에 대한 침공 결정, 태평양 전장(戰場)에 대한 병력 할당, 극동 지역의 주요공격선 결정, 독일에 대한 집중폭격 합의 등 주로 군사적인 것이었다. 또한 루스벨트와 처칠은 핵 폭탄 연구에 관해 논의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독일·이탈리아·일본에게 무조건 항복을 요구한 것이다. 무조건 항복 선언 및 정책은 전쟁이 끝난 뒤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독일 국내의 반대 세력들이 연합국의 보복이 두려워 위축되지 않았더라면 아돌프 히틀러를 무너뜨리고 조기에 평화협상을 할 수 있었으리라는 주장이 일자, 처칠은 독일을 분할하거나 완전히 비무장화하는 것, 강제노역과 물품으로 배상받는 것 등 그 당시 연합국 지도자와 국민들이 받아들일 만한 어떤 협상안도 더욱더 반대 세력을 낙담시켰을 것이라고 답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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