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마일, Moulay Ismail
정식 이름은 Ismā⁽ῑl ibn Sharῑf.
모로코 알라위 왕조의 제2대 군주(1672~1727 재위).
오랜 기간 왕위에 있으면서 알라위의 세력을 확립했고 유럽식 군사훈련을 받은 정비군을 양성했다. 또 그의 재위기간에는 프랑스의 영향이 모로코에 미치기 시작했다.
청소년기에 관해서는 사실상 알려진 것이 전혀 없다. 1672년에 왕조의 창시자인 이복형 알 라시드가 갑자기 죽자 페스 총독대리로 있던 이스마일은 즉각 국고를 장악하고 자신을 왕으로 선포했다. 그의 왕권주장은 그의 동생과 조카, 그리고 모로코 북부의 한 부족장인 알 키드르 길란 등 3명의 경쟁자들로부터 도전을 받았다. 이 경쟁자들은 알제리를 통해 오스만 투르크의 지원을 받았다. 오스만 투르크는 내부의 세력다툼을 지원하여 알라위 왕조를 약화시킴으로써 모로코에까지 통치권을 확대하려는 속셈이었다. 그결과 재위기간 내내 그는 알제리의 오스만 통치자와 경색된 관계를 가졌다. 왕위계승전쟁은 5년간 계속되었다. 알 키드르 길란은 1673년 9월에 패배하여 살해되었으나 이스마일은 동생과 조카를 상대하는 데 훨씬 애를 먹었다. 그는 결국 그들을 중요한 지방의 반(半)독립적인 통치자로 인정하여 모로코 권력구조 내에 편입시켰다. 1686년에 마침내 그의 조카 아흐마드 이븐 마라즈가 패배하여 죽음으로써 그는 모로코를 완전하게 평정했다. 1673년에 이스마일은 아비드('검은') 알 부카리군대를 창설했다. 이 군대는 일상적으로 '부아카르'라는 명칭으로 알려졌는데 노예들을 주인에게서 사들여 자유민 출신의 흑인들과 함께 편성한 군대였다. 이 대원들에게는 여자가 주어졌고 그로부터 난 자식들은 특별학교에 들어가 특수 군사훈련을 받았다. 재위 말년에 이르러 그는 15만 명 이상 되는 흑인 군대를 거느렸으며 그중 약 7만 명은 전략적 예비병력으로 메크네스와 그 주변지역에 배치되었다. 그의 군대는 유럽식 무기를 갖추었고 장교들은 포병과 보병을 효과적으로 배치할 수 있는 전투기술을 익혔다. 그는 이 병력을 이끌고 1679, 1682, 1695(또는 1696)년에 변경을 평정하고 원정을 벌여 오스만군을 치고 알제리의 통치자를 응징했다. 결국 오스만 투르크는 모로코의 독립을 존중하는데 동의했다.
유럽 열강과 이스마일의 관계는 훨씬 더 복잡했다. 그는 유럽인들을 이단자로 여겨 증오했지만 한편으로는 무기와 완제품의 공급자인 그들이 필요했다. 그의 재위기간 내내 모로코 항구에 정착한 유럽인들과 간헐적인 전투가 있었다. 1681년에 그는 스페인에게서 알마무라를 탈취했으며 1684년에는 탕헤르에서 영국인들을 축출했다. 모로코 내의 스페인 정착지를 공격하기 위해 그는 스페인의 적인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친분을 강화했다. 프랑스는 이러한 친선관계를 통해 커다란 상업적 이익을 얻어냈으며 모로코에서 프랑스의 영향력은 최고조에 달했다. 프랑스 장교들이 모로코 포병들을 훈련시키고 공공시설의 건축을 도왔다. 베르사유 궁전의 양식을 본뜬 메크네스 궁은 이스마일의 의지와 결단으로 지은 웅대한 기념비적 건축물이었다. 그는 외국무역을 독점하여 군대와 토목공사를 위해 필요한 세금을 거두었고 해적질을 장려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권위와 종교적 정통성을 입증하기 위해 자신이 예언자 마호메트의 직계 후손으로 특별한 정신적 자질을 지녔기 때문에 통치할 권한이 있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그는 자기 백성들에게 눈에 보이는 충성을 넘은 정신적인 충성과 인정을 받고자 했다.
이스마일은 잔인하고 변덕스러운 통치자로 비난받았으나 알라위 왕조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철권통치가 필요했다. 그는 700명의 아들과 셀 수 없을 정도로 딸을 많이 낳은 것으로 알려졌다. 사후에 아들 아흐마드가 뒤를 이었으나 실권은 아비드 부대 수중에 들어갔으며 그들이 왕가의 운명을 좌우하게 되었다.
정식 이름은 Ismā⁽ῑl ibn Sharῑf.
모로코 알라위 왕조의 제2대 군주(1672~1727 재위).
오랜 기간 왕위에 있으면서 알라위의 세력을 확립했고 유럽식 군사훈련을 받은 정비군을 양성했다. 또 그의 재위기간에는 프랑스의 영향이 모로코에 미치기 시작했다.
청소년기에 관해서는 사실상 알려진 것이 전혀 없다. 1672년에 왕조의 창시자인 이복형 알 라시드가 갑자기 죽자 페스 총독대리로 있던 이스마일은 즉각 국고를 장악하고 자신을 왕으로 선포했다. 그의 왕권주장은 그의 동생과 조카, 그리고 모로코 북부의 한 부족장인 알 키드르 길란 등 3명의 경쟁자들로부터 도전을 받았다. 이 경쟁자들은 알제리를 통해 오스만 투르크의 지원을 받았다. 오스만 투르크는 내부의 세력다툼을 지원하여 알라위 왕조를 약화시킴으로써 모로코에까지 통치권을 확대하려는 속셈이었다. 그결과 재위기간 내내 그는 알제리의 오스만 통치자와 경색된 관계를 가졌다. 왕위계승전쟁은 5년간 계속되었다. 알 키드르 길란은 1673년 9월에 패배하여 살해되었으나 이스마일은 동생과 조카를 상대하는 데 훨씬 애를 먹었다. 그는 결국 그들을 중요한 지방의 반(半)독립적인 통치자로 인정하여 모로코 권력구조 내에 편입시켰다. 1686년에 마침내 그의 조카 아흐마드 이븐 마라즈가 패배하여 죽음으로써 그는 모로코를 완전하게 평정했다. 1673년에 이스마일은 아비드('검은') 알 부카리군대를 창설했다. 이 군대는 일상적으로 '부아카르'라는 명칭으로 알려졌는데 노예들을 주인에게서 사들여 자유민 출신의 흑인들과 함께 편성한 군대였다. 이 대원들에게는 여자가 주어졌고 그로부터 난 자식들은 특별학교에 들어가 특수 군사훈련을 받았다. 재위 말년에 이르러 그는 15만 명 이상 되는 흑인 군대를 거느렸으며 그중 약 7만 명은 전략적 예비병력으로 메크네스와 그 주변지역에 배치되었다. 그의 군대는 유럽식 무기를 갖추었고 장교들은 포병과 보병을 효과적으로 배치할 수 있는 전투기술을 익혔다. 그는 이 병력을 이끌고 1679, 1682, 1695(또는 1696)년에 변경을 평정하고 원정을 벌여 오스만군을 치고 알제리의 통치자를 응징했다. 결국 오스만 투르크는 모로코의 독립을 존중하는데 동의했다.
유럽 열강과 이스마일의 관계는 훨씬 더 복잡했다. 그는 유럽인들을 이단자로 여겨 증오했지만 한편으로는 무기와 완제품의 공급자인 그들이 필요했다. 그의 재위기간 내내 모로코 항구에 정착한 유럽인들과 간헐적인 전투가 있었다. 1681년에 그는 스페인에게서 알마무라를 탈취했으며 1684년에는 탕헤르에서 영국인들을 축출했다. 모로코 내의 스페인 정착지를 공격하기 위해 그는 스페인의 적인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친분을 강화했다. 프랑스는 이러한 친선관계를 통해 커다란 상업적 이익을 얻어냈으며 모로코에서 프랑스의 영향력은 최고조에 달했다. 프랑스 장교들이 모로코 포병들을 훈련시키고 공공시설의 건축을 도왔다. 베르사유 궁전의 양식을 본뜬 메크네스 궁은 이스마일의 의지와 결단으로 지은 웅대한 기념비적 건축물이었다. 그는 외국무역을 독점하여 군대와 토목공사를 위해 필요한 세금을 거두었고 해적질을 장려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권위와 종교적 정통성을 입증하기 위해 자신이 예언자 마호메트의 직계 후손으로 특별한 정신적 자질을 지녔기 때문에 통치할 권한이 있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그는 자기 백성들에게 눈에 보이는 충성을 넘은 정신적인 충성과 인정을 받고자 했다.
이스마일은 잔인하고 변덕스러운 통치자로 비난받았으나 알라위 왕조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철권통치가 필요했다. 그는 700명의 아들과 셀 수 없을 정도로 딸을 많이 낳은 것으로 알려졌다. 사후에 아들 아흐마드가 뒤를 이었으나 실권은 아비드 부대 수중에 들어갔으며 그들이 왕가의 운명을 좌우하게 되었다.